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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85. 태허성숙

 

85. 태허성숙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한 대표적인 스님 가운데 한 분이 태허성숙(太虛星淑, 1898~1969)스님이다. 특히 대한민국이 법통(法統)을 계승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평생 독립운동과 반독재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에 헌신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 스님이다. 님 웨일즈의 유명한 작품 <아리랑>에 나오는 주인공 김산의 정신적 스승으로 묘사되기도 한 태허스님의 행장을 살펴보았다.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에서 도움말과 사진 등 자료를 제공했다.
 
 
“상 받으려고 독립운동 한 것 아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한 유일한 스님
 
남양주 봉선사 월초스님 회상서 ‘정진’  
 
 
○… 1922년 어느 날 광릉 봉선사의 한 방. 월초스님이 두 손상좌를 불렀다. 태허스님과 운허스님이 노 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태허와 운허는 출가 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청년승려’였다. 월초스님은 이미 교육을 통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불교학연구회(이후 명진학교, 지금의 동국대로 발전)를 설립하는 등 조선독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 된다. 하지만 큰 뜻을 이루려면 너희들이 각자의 길을 갈 필요가 있다. 운허는 국내에서, 태허는 대륙에서 활동하거라.” 월초스님은 항일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는 중국 대륙으로 태허스님을 보냈다. 이후 태허와 운허는 노스님의 뜻을 따라 국내외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한다.
 
<사진>스님으로는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태허스님.
 
○… 태허스님의 출가 인연도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다. 만주로 가서 항일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원산에서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려 여관에 감금됐다. 그때가 마침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석왕사에 가기 위해 분주했다. 여관을 몰래 빠져나와 인파에 묻혔다. 다음날 아침 절 마당을 산책하고 있는 한명의 스님을 보고 말을 건넸다. “여보시오. 나도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찌하면 되겄소.” 원산을 무사히 빠져나갈 요량이었다. 그 스님이 물끄러미 바라보면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출가를 하려고 하느냐.” 답했다. “불경을 공부하고 싶소이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스님을 따라 양평 용문사에 가서 출가사문이 됐다.
 
○… 출가 전에 이미 신구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절집에서의 공부를 따라가기가 수월했다. 용문사에서 2년 6개월간 경전을 두루 배웠다. 어느 날 은사인 풍곡스님이 불렀다. “너는 여기선 더 공부할 게 없구나. 큰절로 가서 노스님에게 공부를 더 하거라.” 노 스님은 풍곡스님의 스승인 월초스님. 봉선사 주지로 있던 월초스님은 당시 ‘조선불교계의 거목(巨木)’으로 존경받던 어른이었다. 광릉 봉선사로 주석처를 옮긴 후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불법(佛法)의 오묘한 진리에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정진했다. 훗날 태허스님은 당시 일을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내가 한문을 아니까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 흥미도 많아지고, 그래서 2년 반쯤 스님 노릇하는 방법을 모두 배웠지. 그러고 나니 나를 광릉의 봉선사로 보내 경전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더군.”
 
○…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 수행자의 기초를 공부했다면, 광릉 봉선사는 조선독립의 의지를 더욱 깊게 다진 장소였다. 봉선사 주지 월초스님과 절친했던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이다. 특히 월초스님과 막역한 사이였던 손병희 선생이 자주 봉선사를 찾아왔다. 손병희 선생이 오면 월초스님은 손상좌인 태허스님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물도 갖다 드리고, 이불도 펴드렸다. 이 과정에서 손병희 선생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고, 평소 마음 깊이 지니고 있던 조선독립의 큰 뜻을 펼쳐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리고 만해스님, 김법린 선생과도 알게 되었다. 봉선사에서 만난 인사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전개한 지사(志士)라는 사실은 태허스님이 평생 큰 뜻을 펼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진>풍곡스님에게 받은 전법계첩. 법호가 태허(太虛)와 보허(步虛) 두 가지로 적혀 있다.
 
○… “내가 무슨 상(賞)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평생 독립운동과 좌우합작, 통일운동, 반독재운동에 참여한 태허스님은 그 흔한 ‘벼슬’도 맡지 못했다. 더구나 생전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의 적절한 예우를 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스님은 정부를 원망하지도, 세상을 탓하지도 않았다. 가난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던 날도 “내가 무얼 바란 것이 아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을 뿐이다. 1969년 4월15일자 동아일보에는 ‘애국지사 고(故)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 퇴원비 만원 없어 허덕여’라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로, 평생 청빈하게 살면서 조국이 잘 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 대한민국 정부가 법통(法統)을 승계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지만, 해방 후에 오히려 더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남과 북, 좌와 우로 갈려 싸우는 ‘조국의 현실’에서 태허스님은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이승만에게 정치적 보복을 당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끼니조차 잇기 힘들어 결국은 건강마저 잃게 되었다. 하지만 뜻을 바꾸지는 않았다.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친구의 집 마당 귀퉁이에 가건물을 지어 머물렀다. 노산 이은상은 이 건물에 ‘피우정(避雨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말년에 약조차 변변히 쓸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살림 속에 병마와 처절하게 싸웠지만, 정부에서 주려는 ‘독립유공자 훈장’을 끝내 거절했다. 나라를 빼앗은 일본군 장교 출신의 대통령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한 대표적인 스님이 세 분 있다. 용성스님과 만해스님 그리고 태허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이 스님들은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나라를 빼앗긴 암흑의 시절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한 용성.만해.태허스님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지난 2005년 결성된 ‘운암선생기념사업회’는 2006년 국가보훈처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되어 태허스님을 선양하는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민성진 회장은 “혁신적 양심세력으로 민족을 위해 살다 가신 태허스님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의 통일과 바람직한 민족 문화형성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활동 계획을 설명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태허스님 ‘행장’
 
1898년 3월10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문환(金文煥) 선생, 모친은 임천 조씨(林川趙氏). 어려서 이름은 김성암(金星巖). 어머니가 부처님께 3년간 기도를 하고 낳았을 만큼 불연(佛緣)이 깊다. 운암(雲巖)은 호(號)로 사용했다.
 
서당에 다니며 틈틈이 한학을 익히다 을사늑약(1905년)후 마을에 세워진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선생님들에게 이순신과 을지문덕 등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웠다.
 
풍곡스님을 은사로 출가
 
조계사에서 사회장 엄수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던 삼촌이 찾아왔다. 당시 어른들의 말씀을 어깨 너머로 들으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몰래 집을 나왔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간 그는 배를 타고 청진을 통해 만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검문에 걸려 여관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몰래 빠져나가 석왕사에서 만난 스님을 따라 양평 용문사로 가서 출가했다. 은사는 풍곡신원(楓谷信源)스님. 도첩(度牒)을 받은 것은 1916년 12월3일이고, 도첩에 기록된 출가일은 1916년 11월10일이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용문사와 수국사 창화강원(彰華講院)에서 2년 6개월간 교학을 깊이 공부했다. 당시 창화강원의 교수(지금의 강주)는 이동은(李東隱)스님. 이후 광릉(남양주) 봉선사에서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월초스님은 풍곡스님의 은사로, 성암스님에게는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분이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있던 월초스님을 통해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만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 시기에 봉선사의 몇몇 스님과 양주와 포천에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 연유가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2년간 투옥됐다. 석방 후 봉선사로 돌아온 1922년 성월(惺月)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수계 장소는 소요산 자재암. 이 때 받은 법명이 ‘성숙(星淑)’이다.
 
<사진>1969년 태허스님의 영결식이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엄수됐다.
 
그 뒤로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으며, 감시가 심해지자, 월초스님의 권유로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때가 1923년. 불교유학생으로 북경에 간 스님은 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했다. 조선의열단에도 가입했으며, 1926년 광동에서 열린 광동코뮨에도 참가했다.
 
1936년에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고, 중일전쟁 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만드는 등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중.일전쟁 이후 항일광복운동의 우파인 김구계와 좌파인 김원봉계 통합에 앞장섰으며,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통합을 이끌어 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내무차장, 이듬해 2월에는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돼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및 외교전반에 관여했다. 1943년 3월 내무부 차장, 4월 선전부 선전위원, 1944년 4월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해방 후 귀국해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헌신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수차례 투옥됐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도 옥고를 치렀다. 1969년 4월12일 오전10시 71세를 일기로 원적에 들었고, 장례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엄수됐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으며, 2004년에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안장됐다.
 
독립운동 시절 상해에서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 등 20여 권 책을 번역 또는 저술했다.
 
 
[불교신문 2603호/ 3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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