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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87. 화봉유엽

 

87. 화봉유엽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화봉유엽(華峰柳葉, 1902~1975)스님은 효봉.금봉스님과 함께 ‘석두하삼봉(石頭下三峯)’으로 꼽힐 정도로 수행력이 높은 선지식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수료하고, 문단(文壇)에서도 활약할 만큼 재기(才氣)도 뛰어 났다. <불교신문> 주필을 역임하기도 한 화봉스님의 발자취를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와 스님이 남긴 저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마음 잊고, 생각 쉬면 그 자리가 부처님 자리”
 
 
  일본 와세다대 수료, 만해스님 권유로 집필·출가
 
  해인사 외전 강사로 후학 양성…본지 주필 역임
 
 
○…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해인사에서 강사로 있으면서 학인을 지도할 무렵이었다. 학인 20여명과 함께 수학여행 길에 오른 화봉스님은 부산 범어사에 여장(旅裝)을 풀었다. 일제강점기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문단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화봉스님에게 범어사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 범어사 스님들의 요청으로 도착 당일 저녁에 강연을 했다. 제목은 ‘우주 사차원의 이론’. 이때 스님의 강연을 들었던 김어수(金魚水) 선생은 “첫눈으로 보기에 기품이 늠름하고 언변이 유수(流水) 같고 얼굴이 준수하여 참으로 보기 드문 대장부였으며, 희대(稀代)의 미남자(美男子)였다”고 회고한바 있다.
 
○… 입적에 들기 전 조계사에 가면 화봉스님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경내는 물론 절 앞 거리를 거니는 화봉스님은 한눈에 들어왔다. 우람한 체격에 긴 주장자를 들고는, 굵은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단박에 화봉스님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스님은 흰색 여자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고 한다.
 
<사진>화봉스님 노년 모습.
 
○… “만일 선(禪)을 번역할 수 있다고 허락한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멋’이라고 대답하련다.” 내외전과 선교를 함께 공부하며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화봉스님은 선에 대해 ‘멋’으로 풀이했다. 스님은 선에 대해 당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선은 멋이다. 살림살이다. 이 누리로 더불어 한 풀이 되어 멋지게 어울려 살아가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제 멋대로 걸림이 없이 누리가 나(我)요, 내가 누리로서 누리의 생각이 내 생각이요, 내 생각이 누리의 생각으로 어떠한 공식(公式)이 있거나 방법이 따로 있지도 않고 장소와 때를 가릴 것도 없이 거기에 어울려 한 풀이 될 수 있도록 허공처럼 가슴이 넓고 비어버린 그거다.” 스님은 또 이렇게도 말했다. “그러므로 멋쟁이는 부처요, 알음알이(知識)은 뭇삶(衆生)이다. 멋은 살림살이(生活)요, 속칭(俗稱) 선(禪)이요, 알음알이는 바로 세언저리(三界)다. 속칭 중생계다. … 멋이라는 말은 뭇삶(衆生)들의 본래 깨쳐있는 참바탕을 말한다.”
 
○… 자유자재의 경지에서 노닐던 화봉스님. 한때 ‘무교동 3대 걸물(傑物)’로 불릴 만큼 유명했다. 스님이 입적한 후 돈연(頓然)스님)은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에 ‘화봉은 가고’라는 제목으로 추모의 글을 실었다. 그 가운데 화봉스님을 연상할 수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어제는 논산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오늘은 청주에서 법음을 드날리고 내일은 대전에서 납자를 제접하고 모레는 서울에서 술을 마시던 자재의 인간. 그대는 율장이 있으되 율에 의지하지 않고 경장이 있으되 경에 의지하지 않고 논장이 있으되 논에 의지 하지 않았던 단하나의 무애인(無碍人)”
 
○… 화봉스님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1960~70년대 정부에서 산아제한(産兒制限)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을 무렵, 스님은 부당성을 지적하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조했다. 스님은 “지구는 일찍이 제 능력으로 기를 수 없는 생물은 산출(産出)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면서 “100년 내에 지구 지면상(地面上)에 일편(一片)의 공간적 여지도 없이 콩나물처럼 인류가 박히게 될 것이라는 기우로 산아제한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스님의 이같은 우려는 지금 현실화 되어, 오히려 이제는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 스님은 조계종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스님은 <멋으로 가는 길>에서 조계종 종풍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마음은 언제나 물들지 않고 밝아 있다. 닦음으로 해서 맑아진 것이 아니다. 본래 밝아 있다. 그러므로 물론 깨쳐 있다. 우리가 공부하고 닦는다는 것은 우리 생각을 비워 원래 깨쳐 있는 마음이 깨끗이 비워있음을 나타내도록 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에 그리 쉽게 되지 않기 때문에 시나브로 닦는다는 말이다. 우리들의 공부는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쉬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본래 마음의 바탕이 바로 나타나도록 그것을 닦는 것이다. 바로 이게 조계종풍이다.”
 
○… “나에게는 신념이 있다. 이 국토에 태어나서 일찍이 이 국토를 배반한 일이 없고,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배신한 일이 없다. 친일(親日)한 일도 없고, 외국인에게 아첨해 본 일도 없다. 나의 영화(榮華)를 위하여 권력 앞에 머리를 숙인 일도 없고, 나의 출세를 위하여 남을 악용한 일도 없다. 없는 지위 없는 재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계책(計策)을 세우누라 노심초사해 본일도 없고 지금이나 후세까지라도 나를 시비할 자가 있을리 없다.”
 
○… 양주동 박사는 화봉스님에 대해 “색계(色界)를 거닐며 공(空)을 외치던 당대의 걸승(傑僧)”이라고 평한바 있다. 양주동 박사와 화봉스님은 세속 나이가 같고, 생각이 통하는 바가 있어 매우 가깝게 지냈다. 양주동 박사는 “동서의 성악, 기악, 아울러 신시, 외극(外劇) 등 여러 방면에 그야말로 팔면(八面) 영롱한 재주를 가진 친구였다”면서 각별한 사이임을 여러차례 밝혔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마음 잊어버리고, 생각을 쉬어 버리면 바로 그 자리가 참 부처님 자리요, 바로 그게 참다운 멋진 자리인데, 공연히 이러쿵저러쿵 말을 많이 해야만 무엇을 잘 아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보는 버릇이 생겼다.”
 
“짐승들은 된 대로 주어진 대로 살고 있으나, 사람들은 길(道)을 만들어 길로 다니고 있다. 길로 다니는 것이 사람이요, 길 없이 다니는 것이 짐승이다.”
 
“경(經)은 부처님 말씀이요, 멋은 스님의 말인데, 부처님을 어기고 스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의심스런 일이다.”
 
“이 세상에서 가정을 가져서는 될 수 없는 세 가지 사회적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단(敎團)의 성직자요, 둘째는 혁명가요, 셋째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두 가지 주인을 모실 수 없습니다.”
 
<사진>스님의 저서인 ‘멋으로 가는 길’ 표지.
  
 
 
■ 스님이 남긴 시
 
立理是非生(입리시비생)  이치로는 시비(옳고 그름)가 생길지라도
 
息情憎愛沒(식정증애몰)  들뜬 정을 쉬면 애증이 사라지노라
 
水流雲去前(수류운거전)  물이 흐르기 이전과 구름 떠나기 전 소식을 안다면
 
打破虛空骨(타파허공골)  허공의 실체가 드러나리니
 
卓上彌陀眞(탁상미타진)  이 어찌 탁자의 미륵보살 참모습과
 
市中醉主人(시중취주인)  세간의 술에 취한 이를 대비해
 
是非何足道(시비하족도)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으리오
 
楊柳己三春(양유기삼춘)  수양버들 늘어진지 3년에
 
釋迦老子(석가노자)  석가노자가 출현했도다!
 
한글풀이 자료제공=제24교구 선운사 승가대학장 법광스님
 
 
 
 
<사진>화봉스님의 친필. 왼쪽 사진이 시. 자료제공=통도사성보박물관
 
 
 
 
■ 행장
  
1902년10월13일 전북 전주시 완산동 176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성안(柳聖安) 선생, 모친은 김성희(金聖喜)여사. 본관은 문화(文化). 3남3녀의 장남으로 속명은 유춘섭(柳春燮)이다.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다니다 동경 대지진으로 졸업 1년 전에 귀국했다.
 
 
석두스님 제자로 출가
 
송광사 부도 · 비 모셔
 
 
조선에 돌아온 후 만해스님이 발행하는 잡지 <불교(佛敎)>에 입사했으며, 시(詩)동인지 <금성(金星)>의 간행에 참여하는 등 뛰어난 문필로 명성을 떨쳤다. 1925년 만해스님의 소개로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최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의 은사인 효봉(曉峰)스님의 사제(師弟, 동생)이다. 이후 스님은 장안사 지장암,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교와 선을 배웠다. 1927년 해인사 강원 외과 강사로 후학을 지도했다. 1935년에는 금강산 신계사 봉래암에서 은사 석두스님을 모시고 정진했다. 일제강점기에 하기락, 전진한 등과 함께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해방후인 1945년 8월18일 열린 조선불교혁신준비대회에 참여했으며, 같은달 20일 건국청연당원 40여명과 함께 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원의 이종욱 종무총장을 방문해 종단 운영권을 인수했다. 1946년에는 불교중앙총무원 교무부장에 취임했다. 또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 섰으며, 독립노동당의 외무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불교신문.서울신문.국제신보 주필 등을 역임했다. 총무원 교무부장과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 교수를 지냈다. <민족문화(民族文化)>를 간행한 것은 물론 <화봉섬어(華峯蟾語)> <멋으로 가는 길> 등의 저서를 펴냈다. 또한 시와 수필 등을 다수 남겼다.
 
1962년 사형(師兄)인 효봉스님 증명하에 다시 삭발했다. 1964년 종단 정화불사 당시 순천 선암사 주지 소임을 맡기도 했다.
 
1975년 11월21일(양력) 오전1시 서울 사간동 법련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4세. 법납 51세. 스님의 장례는 2일장으로 엄수됐고, 49재는 1976년 1월8일(음력 12월8일)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거행됐다. 스님의 부도와 비는 송광사에 모셔져 있다. 진영은 통영 미래사에 봉안돼 있다.
 
 
[불교신문 2607호/ 3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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