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88. 대응만우

 

88. 대응만우

 
 
 
 
1945년 8.15 해방 후 양산 통도사의 첫 주지로 추대된 대응만우(大應萬佑, 1897~1968)스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해 수차례 투옥되었으며, 구하(九河)스님과 함께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일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은 지난 1일 제91주년 3.1절을 맞아 항일독립운동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대응스님의 수행 일화를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상좌 임채옥 선생(84)을 통해 들었다.
 
 
8·15 광복 후 첫 통도사 주지 ‘독립유공자’
 
 
구하스님 도움 받아 조선독립 운동 참여
 
3·1 만세  ·  고종 만장시 연류 ‘투옥’도
 
 
○…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마을 서당에서 겨우 천자문을 배웠다.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절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때 나이 15세, 1911년 6월 초다. 찾아간 곳은 동래 범어사였다. 하지만 범어사에선 공부는 가르쳐 주지 않고, 나무 하고, 풀 뽑는 일만 시켰다. 공부의 방편이었지만, 소년의 마음엔 흡족하지 않았다. 그해 추석날 아침 범어사를 나와 양산 통도사로 갔다. 구하(九河)스님을 친견하고 “중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에 구하스님은 “나에게는 시봉하는 행자가 있으니, 너는 나의 사제(師弟)인 원담(圓潭)의 상좌가 되라”고 권했다. 당시 원담스님은 통도사 중로전(中爐殿) 감원 소임을 맡고 있었다. 원담스님 문하에서 예불의식과 경전을 익혔다.
 
<사진>대응만우스님. 4년간 통도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절에서 15km나 떨어져 있는 언양에서 전기를 끌어왔다. 전주와 전선의 비용을 통도사에서 부담했으며, 이때부터 통도사의 전각과 요사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사진제공=임채옥
 
○… 통도사 전문강원 학인 및 승려 20명과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 10여 명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하북면 신평리 만세시위에서 만우스님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마침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도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동참했으며, 만우스님을 비롯한 통도사 스님들은 급히 몸을 숨겨야 했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고 있던 중, 구하스님이 사람을 보내 왔다. 야밤을 틈타 몰래 찾아온 만우스님에게 구하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야, 이놈아. 어찌하자고 만세운동을 주동하는 역할을 했느냐. 너는 힘도 세고 투쟁력이 강해 무사정신을 가진 것 같다. 일본 경찰에 붙잡히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징역도 살 수 있으니 멀리 피신하거라.” 이날 밤 구하스님은 만우스님에게 도피자금으로 1원짜리 100장을 묶은 100원을 주면서 몸을 숨길 것을 당부했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5원이었다고 하니, 무려 쌀 20가마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비록 야단을 쳤지만 구하스님은 만우스님을 비롯한 젊은 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던 것이다.
 
○…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며 불공(佛供)을 올리고, 법문도 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유점사 도명스님의 안내로 마의태자 묘를 참배하게 됐다. 나라가 망한 후 금강산에 은둔하며 여생을 보낸 마의태자 묘 앞에서 삼배의 예를 올린 만우스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마의태자는 태자의 신분으로 이곳에 와서 여생을 마쳤고, 나 역시 나라가 망하고 3.1 독립 만세 사건으로 걸어 걸어 망국의 한을 품고 여기에 왔구나.”
 
○… 금강산에서 원산으로 나온 후 칠보산 개심사를 거쳐 두만강 건너 도문(圖們)에 도착했다. 유점사에 있을 당시 도문에 가면 조선무관학교(朝鮮武官學校)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 가보니 도문과 용정 근처에는 무관학교가 없고, 아주 비밀리에 점조직 형태로 입교생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봉천성 통하현까지 가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조선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 조선으로 돌아온 1920년 4월 초파일을 얼마 앞두고 묘향산 보현사에 들렀다. 구하스님을 모시고 30본산 주지회의 때 인사한 적이 있는 보현사 주지 배영해스님이 “어떻게 이렇게 먼 곳까지 왔냐”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초파일을 맞아 보현사에는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이때 만우스님이 봉축법회에서 축원(祝願)을 자청하고 나섰다. 워낙 음성이 좋아 스님의 축원을 들은 이들이 환희심을 냈을 정도였다. 경성 각황사에 전국에서 온 스님들이 모임과 법회를 할 때도 만우스님을 ‘조선의 1인자’로 꼽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염불과 독경을 카세트테이프로 발간한 성공스님도 만우스님의 제자이다. 스님은 범패뿐 아니라 ‘전통 학춤’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인간문화재인 김덕명 선생도 만우스님에게 학춤을 전수 받았다.
 
○… 보현사에 머물고 있을 때, 평양에 있는 조선재래학학교(朝鮮在來學學校)의 한 선생이 스님들을 초청해 점심공양을 모셨다. 평안도 수심가의 전수자인 이 선생은 만우스님에게 “불공을 드리러 보현사에 자주 가는데 스님의 염불소리는 마치 부처님께서 강림(降臨)하신 듯 심금을 울린다”며 경의를 표했다. 스님은 보름 동안 이 선생에게 평안도 수심가를 배워 완창(完唱)했다고 한다.
 
○… 보현사에 머물던 스님은 황주 정방산 성불사를 거쳐 경성 각황사로 왔다. 이때가 1920년 6월 초. 각황사에서 만난 통도사 출신 강신창(姜信昌) 스님을 통해 큰절 상황을 전해 들었고, 친일과 항일로 나뉜 ‘조선불교의 현실’을 알았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대표로 참여한 만해스님과 용성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때 친일승려들에 대항하는 뜻을 같이한 스님 100여 명과 함께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창립했다. 참여한 스님들의 상당수가 재학하고 있는 불교중앙학림(현 동국대)에 편입한 후 그해 8월 말 몰래 통도사에 들러 구하스님과 원담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재상경했다. 이때 9월 3종형(三從兄) 밑으로 호적을 들였고, 이름을 양무홍(梁武弘)이라 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무관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무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1941년 9월3일 통도사에서 설립한 통도중학교 학감(學監)으로 있을 당시, 교사 조병구(曹秉球) 선생과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학생들에게 ‘고종황제만장시(輓章詩)’와 ‘독립기원의 시(詩)’를 학내에 전파했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50여 명이 일시에 검거됐고, 만우스님도 9월13일 양산경찰서에 피검되어 3개월간이나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구하스님의 구명운동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 1945년 8월 해방 후 만우스님은 통도사 주지로 선출됐다. 그해 10월에 열린 산중대회에서 만장일치로 ‘광복 후 첫 주지’에 선출된 것이다. 스님은 1949년 9월까지 4년간 주지로 재임하면서 3대 사업을 전개했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에 전쟁물자로 강탈당한 금강계단 뒤 석가여래정골사리탑 청동조형망울타리를 석물(石物)로 복원했다. 둘째는 절에서 15km나 떨어져 있는 언양에서 전기를 끌어왔다. 전주와 전선의 비용을 통도사에서 부담했으며, 이때부터 통도사의 전각과 요사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셋째는 1943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 통도중학교를 계승해 1946년 보광중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일본 입정대학교 부속학교인 입정상업학교를 범어사와 함께 인수해 해동중학교(현 해동고등학교)로 개명, 인재양성에 나섰다.
 
당시 만우스님은 구하스님과 늘 현안에 대해 상의하는 것은 물론 통도사 종무위원들의 협조를 받아 사업을 집행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통도사 ‘충절의 오대사’
 
구하·택언·대응·병구·말복 스님
 
‘오절중심’ 구하스님 유공자 돼야
 
일제강점기 통도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음과 양으로 노력한 스님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5명의 스님을 꼽아 ‘충절(忠節)의 오대사(五大師)’라고 칭했다. 약칭 ‘통도오절(通度五節)’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전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스님들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했던 김구하(金九河)스님. 1919년 3.1운동 당시 만해스님의 지시를 받아 신평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오택언(吳澤彦) 스님과 양대응(梁大應)스님. 1941년 항일시를 교사와 학생들에게 알려 체포된 조병구(曹秉球)스님과 김말복(金末福)스님 등 다섯 명이다.
 
<사진>일제강점기 통도중학교 자리. 지금의 통도사성보박물관 근처이다. 대응스님은 통도중학교 학감을 지냈다.
 
이 가운데 오택언.조병구.김말복 스님은 독립유공자 애족장을 받았고, 양대응 스님도 이번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통도오절’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었던 구하스님이 독립유공자 반석에 올라야 할 것이다.
 
 
 
 
 
■ 행장
 
친일승려 명고축출 ‘가담’
 
만당 사건으로 체포 구금
 
1897년 6월7일(음력) 경남 양산군 상서면(지금의 양산시 물금면) 범어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양용리 선생이고, 모친은 이구품 여사이다. 속명은 양만우(梁萬佑). 이명(異名)은 무홍(武弘).대응(大應)이다. 만우는 법명(法名), 대응은 법호(法號)이기도 하다.
 
1911년 6월 부산 범어사로 입산해 3개월까지 공부하다, 같은 해 9월 양산 통도사로 이전입산(移轉入山)한다. 은사는 김구하(金九河)스님의 사제(師弟)인 곽원담(郭圓潭)스님. 이때부터 1914년 9월까지 통도사에서 <초발심자경문> <치문> 을 공부하고 비구계를 받는다. 이어 1918년 3월까지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사집> <사경><대교>를 공부하고 졸업한다. 1919년 3월13일 통도사 아래 하북면 신평리에서 독립만세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9월1일부터 1922년 3월까지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에서 공부했다. 1920년 9월20일 경성 각황사(현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조선불교청년회 결성을 주도했다. 1922년 3월26일 도반들과 함께 친일승려인 강대련(姜大蓮)의 명고축출(鳴鼓逐出)에 참여했다. 이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10년간 금강산.보현산.만주 등지를 오가며 피신 생활을 했다.
 
1928년 5월 양산 통도사로 돌아와 건당식을 갖고 대응(大應)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1940년 5월까지 통도사 울산포교당, 울산 문수암 감원, 마산포교당, 진주포교당 포교사의 소임을 보았다. 진주포교당 포교사로 있던 1938년 비밀항일운동결사체인 만당(卍黨)사건으로 체포되어 진주경찰서에 구금됐다.
 
1940년 5월부터 1944년 4월까지 통도사 감무(監務) 직책을 맡았으며,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1949년 9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지냈다. 1950년 1월부터 1953년까지 천성산 내원사 주지, 1959년부터 1968년 2월 입적할 때까지 양산 용화사 주지 소임을 보았다. 1960년부터 1966년까지는 동국대학교 감사를 맡았다. 1968년 2월1일(음력) 입적했다. 세수 71세, 법납 56세.
 
 
[불교신문 2609호/ 3월27일자]

'불교교리와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지식] 90. 무소유 실천 앞장선 스님들  (0) 2010.10.02
[선지식] 89. 대련덕문  (0) 2010.09.18
[선지식] 87. 화봉유엽  (0) 2010.09.04
[선지식] 86. 전강영신  (0) 2010.08.28
[선지식] 85. 태허성숙  (0) 201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