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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기성스님 -이목구비 해학적 표현 ‘눈길’

 

기성스님 -이목구비 해학적 표현 ‘눈길’


“(기성)대사의 자비지학(慈悲之學)이 훌륭하도다. 원근(遠近)에서 대사의 명성을 듣고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으니 강의의 재주가 막힘이 없고 음성이 우렁차고 귀에 깨우치도록 가르침에, 빠르게 마음을 바꾸고 믿음을 일으켜 도(道)에 나아가는 자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서산대사의 법손으로 한 평생 선교를 아우르는 수행에 매진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고승 기성 쾌선(箕城快善, 1693~1764)스님. 기성스님의 비명을 찬술한 조선시대 유학자 이미(李彌)는 스님의 뛰어난 공덕을 이같이 찬술했다.
 

                

수행 교학에 서예까지 능통
                             
유명사찰 대웅전 편액 남겨

  

 
기성스님은 1693년(숙종19)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법명은 기성(箕城), 법호는 쾌선(快善), 속성은 유(柳) 씨다. 13살의 나이에 군위 팔공산 송림사에서 민식대사 문하로 출가, 이듬해 서귀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어 대조스님과 홍제스님에게 교학을 배워 25세에 홍제스님의 법을 이었다.

<사진> 경산 영남대박불관에 모셔져 있는 기성스님 진영.

이후 스님은 수년간 각처의 명산대찰을 돌며 수행하다가 다시 팔공산 은해사로 돌아와 기기암을 짓고 정진했다. 수행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스님은 1764년(영조40) 법랍 60년, 세수 7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제자들이 스님의 유언에 따라 동봉(東峯) 밑에서 다비하니 이마 뼈가 수백 보 밖으로 튀어나와 층암(層巖) 위에 놓이고, 그 빛이 백옥 같아 산과 들에 찬연했다고 한다. 스님의 저술로는 정토신앙의 선적 수용을 설한 <청택법보은문(請擇法報恩文>과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등이 있다. 스님의 비문은 조선후기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이미가 짓고, 문신 윤동섬(尹東暹)이 예서체로 직접 썼다. 이 비는 송림사에 모셔져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스님은 수행과 교학은 물론 서예에도 능해 많은 사찰에 글씨를 남겼다. 준건(遵健)한 서체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스님의 글씨는 대구 동화사의 ‘대웅전’, ‘봉서루’, ‘팔공산동화사봉황문’을 비롯해 영천 은해사의 ‘극락전’, 대구 북지장사의 ‘대웅전’, 성주 선석사의 ‘대웅전’, 영광 불갑사 ‘대웅전’, 창원 성주사 ‘대웅전’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대다수 편액들은 같은 글씨로 동화사 대웅전을 비슷한 시기에 번각한 것이다.

기성스님의 진영은 현재 경산 영남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진영은 75×115.5cm 규모로 비단에 채색돼 있다. 좌측 상단에 ‘기성당대선사지영(箕城堂大禪師之影)’이란 제목이 기록돼 있는 이 진영에서 스님의 얼굴은 웃음을 가득 머금은 눈매와 입술, 크고 길게 빠진 코끝 등 이목구비가 해학적으로 표현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허정철 기자


[불교신문 2453호/ 8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