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교리와법문

[고승]영파 성규스님-대강백 풍모, 살아날 듯 생생

 

영파 성규스님-대강백 풍모, 살아날 듯 생생


“연담스님이 입적한 이래 명성과 인품에서 영파 성규스님보다 뛰어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蓮潭沒後 名德之盛 無出波之右).”

해남 대흥사 13대 강사 가운데 한 분으로 조선 중후기 화엄의 종지를 드높인 대강백이자 선지식인 영파 성규스님(影波 聖奎, 1728~1812). 당대를 함께 풍미했던 고승 은봉 두예(隱峯 斗藝)스님은 영파스님의 높은 공덕을 이같이 찬탄했다.


화엄의 종지 드높인 당대의 선승

화폭속 모습서 검소한 삶 느껴져


영규스님은 1728년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법호는 법명은 성규(聖奎), 법호는 영파(影波), 속성은 김 씨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던 스님은 당대의 명필 이광사(1705~1777)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1742년(영조 18)에 청량암에서 수학하다 불교에 심취하게 되고, 3년 뒤 20살의 나이로 출가를 결심했다. 청도 용천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해봉 유기(海峰有璣)를 비롯한 여러 고승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사진설명> 예천 용문사에 봉안돼 있는 성규스님 진영.

특히 그 무렵부터 <화엄경>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해 30년을 하루같이 경전탐구에 매진했다. 이 과정에서 당대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쳤던 설파 상언, 함월 해원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되고, 이후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禪敎)의 요체를 모두 터득하게 됐다. 이런 끈질긴 노력으로 깊어진 학문은 이후 전국에서 펼쳐진 강석을 통해 후학들에게 전해지게 됐다.

당시 대중들을 부르지 않아도 스님의 주위에는 늘 학인들이 몰려들었고, 명예를 팔지 알아도 스님의 문전에는 항상 제자들로 붐볐다고 한다. 특히 스님이 강사로 주석하던 당시 대흥사 약사전에서 열린 법회에는 전국에서 운집한 사부대중으로 대성황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말년까지 설법을 통해 후진양성에 매진했던 스님은 1812년(순조 12) 세수 85세, 법랍 66년을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1816년(순조 16) 스님이 입적한 지 4년이 지나 당시 규장각 제학(提學)이었던 남공철(1760∼1840)이 글을 쓴 비가 영천 은해사에 세워졌다.

이처럼 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영규스님의 진영은 양산 통도사, 예천 용문사, 문경 김룡사 화장암 등에 모셔져 있다. 4점의 진영 모두 얼굴표정과 자세 등이 비슷해 하나의 모본(母本)을 토대로 여러 본의 진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용문사 진영은 오른쪽에 스님의 스스로 지은 찬문이 실려 있고, 그 옆에 “계미년 3월 6세손인 설해 민정이 삼가 공경히 향을 사르고 고쳐 그리다”라는 화기가 남아있어 1883년(고종 2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님은 이 진영에서 오른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두 손에는 주장자와 염주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일생을 검소하게 살다간 선승의 풍모가 느껴진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51호/ 8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