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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기암당 법견스님-승병장보다 고승의 모습 ‘오롯’

 

기암당 법견스님-승병장보다 고승의 모습 ‘오롯’

 

“금년에는 작년보다 더욱 가난해졌으니, 길 떠나는 그대에게 줄 물건이 없네. 뜰아래 잣나무 한 그루 있어 그대에게 주노니, 때때로 마음에 묻어 두고 뼈에 새기라.” (법견스님 시문집 <기암집> 중에서)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진 휴정스님의 대표적인 제자로 임진왜란 승병활동과 선시로 당대 이름을 날렸던 조선중기 고승 기암당 법견스님(奇巖 法堅, 1552~1634). 스님의 법호는 기암, 법명이 법견이다.

비단바탕에 채색, 보존도 잘돼

입 주름 수염 등 사실적 묘사

법견스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속성은 김 씨로 어머니 이 씨가 꿈에 머리를 삭발한 사람이 의탁해 들어온 태몽을 꾸고 스님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스님은 출가 전 30여 년간 유교 경전에 통달하여 문집과 역사서 뿐 아니라 기타서적의 정수를 두루 갖추었지만, 문득 ‘세간의 법’이 부질없음을 깨달고 출가했다.

<사진> 밀양 표충사에 모셔져 있는 법견스님 진영.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휴정스님의 뜻에 따라 승병을 이끌고 호남지역에서 활약했다. 특히 스님은 당시 여수 흥국사 출신 승병 300여 명과 함께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는 등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 스님은 승병장으로 1594년 전남 장성 입암산성(笠巖山城, 사적 제384호)의 축조를 감독했으며, 성이 완성되자 총섭이 되어 산성의 수호를 맡기도 했다. 성내에 크고 작은 방축을 두어 수원(水源)을 확보해 장기간의 방어가 가능하도록 배려한 이 산성은 조선후기 관방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지리산과 금강산에서 30여 년을 수행에 몰두한 스님은 내외전은 물론 시문에도 능통해 사대부들과 시로써 교유하기도 했다. 스님의 시문을 모아 정리한 <기암집>은 3권 1책 목판본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스님은 1634년(인조 12) 9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법개공(萬法皆空)이니 나는 그것을 행하였도다”란 게송을 대중들에게 남기고 입적했다. 세수는 83세였다.

법견스님의 진영은 밀양 표충사에 모셔져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진영은 보존상태가 좋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다른 고승의 진영 25폭, 탱화 1폭 등과 함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일괄 지정됐다. 비단바탕에 채색돼 있는 진영의 왼쪽 상단에는 ‘기암당대선사지진상(奇巖堂大禪師之眞相)’이라고 쓰여져 있다.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진영에 표현된 스님의 전체적인 느낌은 승병장으로서의 면모보다는 덕망 높은 고승의 모습에 가깝다.

꽉 다물어져 있는 입, 턱과 목 근처에 주름, 수염가닥까지 세밀하게 표현한 사실적 묘사가 눈에 띈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44호/ 7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