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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환성 지안스님-학문의 깊이만큼 화려한 색채 ‘눈길’

 

환성 지안스님-학문의 깊이만큼 화려한 색채 ‘눈길’


조선중기 화엄학의 일인자로 손꼽히며 일생을 강설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고승 환성 지안스님(喚醒志安 1664~1729). 지안스님은 1664년(조선 현종 5)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기상이 남달랐던 스님은 1678년(숙종 4) 15살의 나이로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했다. 스님의 법호는 환성, 법명은 지안이다. 2년 후 경전 주석서를 쓸 정도로 학식이 높았던 쌍봉 정원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화엄학의 대가 풍담 의심스님의 수제자 월담 설제스님의 법을 이어 학문에 매진했다.

 

벽면ㆍ의자 등 문양 세세히 표현

강한 색상대비…전체구도 안정적

당시 화엄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았던 모운 진언스님도 지안스님의 학식에 탄복해 제자들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사찰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를 보면 스님의 학문의 깊이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후 지안스님은 경학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전국에서 학인스님들이 모여들었다. 1725년(영조 1)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1500여 명의 대중이 몰려드는 등 당시 승단의 규모를 감안하면 스님 강설에 대한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스님의 이러한 인기는 조정과 유생들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무고한 음해로 이어졌다. 조정에는 스님의 처벌을 주청하는 상소문이 끊임없이 올라왔고 스님은 결국 1729년 귀향길에 오르게 이른다. 제주도로 유배된 지 일주일 만인 7월7일 법랍 51세, 세수 6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사진> 양산 통도사에 봉안돼 있는 지안스님 진영.

지안스님의 진영은 통도사, 봉정사 등에 봉안돼 있다. 이 가운데 통도사에 모셔져 있는 스님의 진영은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표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벽면과 의자 등받이에까지 문양이 그려져 있고, 색상의 강한 대비가 도드라진다. 또 왼손으로 불자를 쥐고 있는데 이 역시 화려하다. 불자는 자루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머리장식이 용두로 되어있다. 그 끝에 고운 희 술이 달려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안정적이지만, 안면의 표정이 굳어 심성표출을 중요시하는 초상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특히 진영에 ‘옥인’이라는 화승이 1799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 화기 ‘(嘉慶四年己未仲夏 圖眞 良工玉仁)’이 남아있어 양식적 시대구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지안스님을 칭송하는 4언절구 16자로 구성된 찬문이 함께 수록돼 있는 것도 이 진영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찬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환성스님 3대의 진영(喚惺三代影) / 4대 후손에 열었네(四大後孫開). / 천년 동안 고이 전해져(安位千세下) / 법손 무진토록 이어지리라(法孫濟濟來). / (진영의 조성은) 영월이 주간하였다(主幹影月).”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38호/ 6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