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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괴산 공림사의 송시열

 

괴산 공림사의 송시열

 

 전 조계종 총무원장 탄성스님이 중창한 공림사로 들어가는 입구. 





‘空’의 가을 숲서 영욕의 세월 곱씹었을까



공림사(公林寺)의 공은 본래 공(空)을 썼다. 사적비에 따르면 신라 경문왕 때 자정국사(慈淨國師)란 스님이 지은 사찰로 전해진다. 도(道)와 덕(德)이 높아 사방에 이름을 떨쳤다. 우러러보던 임금이 국사로 봉하자 스님은 낙영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거기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임금이 이를 알고 ‘공림(空林)’이란 이름을 사액했다. 다만 사적비 이외의 역사는 신라에 자정이란 법명의 스님이 살았다고 기록한 적이 없다. 자정국사 미수스님(彌授, 1240~1327)을 혼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공림은 ‘나뭇잎이 떨어진 공허한 숲’을 이른다. 과연 단풍에 휘감긴 공림사는 절경이었다. 창건 이후 사찰은 무럭무럭 커졌다. 자정의 삶을 숭모한 함허 득통스님(涵虛得通, 1376~1433)이 법당과 요사를 다시 세워 몸을 찌웠다. 괴산은 험준한 죽령을 거치지 않고 곧장 영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목이었다. 적들이 선호해 마지않는 길이었고 공림사는 임진왜란으로 몸을 잃었다. 1688년과 1720년에 있었던 중수는 한국전쟁이 없던 일로 만들었다. 수령 천년을 헤아리는 괴목 한 그루만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 괴목은 특유의 거칠고 두툼한 몸짓으로 장수(長壽)의 희열을 발산했다.

1994년 종단개혁 시절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탄성(呑星)스님이 1981년 중흥불사를 시작했다. 스님은 절을 손보기 전에 이름부터 바꿨다. 공(公),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전란 통에 번번이 빈숲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고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절을 사랑했다. 손수 연장을 쥐었고 버스 탈 돈까지 자재비에 털어 넣었다.

오늘날 공림사에 보이는 대부분의 인공(人工)은 당신과 제자들 덕분이다. 전문적인 목수를 제외하면 인부는 모두 스님들로 꾸려졌다. 예닐곱 명이 손수 나무를 날랐고 나무 값을 대기 위해 논밭을 갈았다. 주지 혜우스님은 탄성스님의 상좌다. 스님이 기억하는 스승은 지역 내 버스 배차시간과 서울의 지하철 노선을 줄줄 외웠던 분이다.

“춘궁기에 힘들었던 살림을 생각하면 대중교통 이용도 사치”라고 가르쳤다. 변변한 전각 없이 땅만 넓었던 절에 조금씩 위엄과 영성이 생겼다. 감인선원(堪忍禪院)을 운영하고 있으며 30명은 족히 생활할 수 있는 수련시설도 마련했다. 공림사의 낙엽이 아름답게 여겨진 이유는 주변에 살아있는 것들이 건강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公)을 누리려면 인간은 공(空)을 택해야 한다는 것. 눈에는 분명하게 보여도 막상 손에 쥐기엔 껄끄러운 이치.

 

부활하고 싶다는 건지 윤회의 사슬을 끊고 싶다는 건지

본심을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았다.

 삶에 대한 희망과 공포가 혼재한다.

자연이 공(空)하면 아름답지만 인간이 공하면 추하다.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한다.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고 욕하지 않으면

욕먹는다. 죽을 때까지 죽여야 하는 실존의 지겨움.

 

낙영산은 속리산을 조산으로 한 바위산이다. 해발 746m로 백악산과 도명산, 화양계곡과 용대천 사이에 솟았다. 암골미(巖骨美)가 뛰어나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와 같은 기암이 많다. 해가 뜨면 산의 뼈들은 그림자가 되어 땅으로 물로 곧추 내리꽂혔다. 얼마나 서슬이 강했는지 낙영(落影)의 잔상은 멀리 중국의 낙양까지 뻗쳤고 당 태종이 기겁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낙영산의 등산로는 으레 공림사-낙영산-도명산-화양계곡으로 잡는다. 짧지만 위험한 길이다.

화양계곡은 아홉 개의 골짜기가 눙친 물길로 신선이 점찍을 만한 별천지다. 실제로 신선들이 넓은 반석 위에 앉아 술잔을 주고받았다는 파곳은 제9곡이다.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 윗자락에 암서재(巖書齋)가 놓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정계 은퇴 후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처소다. 공림사에서 차량으로 10분 남짓 거리에 그의 묘소가 있다.

송시열은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자(子)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공자의 적통을 이었다는 뜻이다. 죽은 지 5년 만에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안치한 문묘(文廟)에 추증됐다. 1787년 조선 정부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편찬하면서 그가 성인(聖人)임을 공식화했다. 얼핏 영예로운 고종명을 맞았을 것 같지만 그의 죽음은 비참했다.

1689년 장희빈의 아들이 태어난 바로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우암은 명분에 죽고 사는 위인이었다.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희빈과 남인의 미움을 사 제주도에 유배됐다. 이어 국문을 위해 서울로 호송되던 중 마음을 바꾼 숙종이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내렸다. 여든의 노구에 피를 쏟는 험한 꼴을 당한 우암은 노론의 요구로 사후 명예를 회복했다. 같은 임금이 잔인하게 죽이고 성스럽게 부활시켰다. 목을 자른 뒤에 황금으로 된 감투를 씌워준 셈이다.

<사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묘.

이른바 예송(禮訟) 논쟁은 17대 왕 효종이 죽었을 때 그의 계모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입씨름이다. 성리학적 질서로 봉인된 조선 사회는 예가 곧 법이었다.

효종이 인종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고 비록 왕위에 올랐더라도 어쩔 수 없는 차남이므로, 대비는 3년 복이 아닌 1년 복만 입으면 된다는 게 우암과 서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논리는 이념적 아버지였던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의거했다. 반면 남인은 효종이 차남이더라도 엄연히 왕통을 이은 적자이므로 3년 복이 옳다고 주장했다. 한쪽은 법대로 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융통성을 발휘하자는 것이었다. 남인은 우암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며 집요하게 모함했지만, 우암은 기어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기해예송(1659)이다.

예송논쟁은 단순히 예법 해석에 따른 갈등이 아니라 지난했던 권력 투쟁의 편린이다. 인조반정과 공신들의 논공행상, 청나라의 침공과 삼전도의 항복, 청나라를 이용하려 했던 소현세자와 청나라에 복수하려 했던 봉림대군(효종) 그리고 차남을 편애했던 인조, 신권강화 세력과 왕권강화 세력의 충돌,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대리전, 장희빈의 죽음과 영조의 즉위로 인한 노론의 일당독재 체제 확립, 정조의 등장으로 재기했다가 정조의 죽음으로 영구 몰락한 남인 …. 벼슬아치라면 누구나 입장해야 할 복마전(伏魔殿)이었다. 임금은 권위를 지키기 위해 편파를 즐겼고 신하들은 살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었다. 우암 역시 파직과 복권을 반복하며 오기를 다지고 권력을 찌웠다. 우리나라 ‘보수’의 원조는 오래 사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보여줬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죽음이었다.

붕당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차는 뚜렷하다. 편 가르고 싸우기 좋아하는 민족성의 극명한 발로라는 설은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다. 그러나 학문적 사상적 견제를 통한 건전한 정치문화 실현이라는 주장도 집권당의 비리와 부패 앞에서 빛이 바랜다. 우암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위상은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에 못지않은 도학을 완성한 군자’와 ‘시대의 변화를 간파하지 못한 채 허학(虛學)이나 일삼던 권신’ 사이에서 아직도 거처를 잡지 못했다.

‘골짜기의 연하 개려 하는데(洞裏烟霞鎖欲開) / 깊은 밤 별빛 아래 잠깐 배회했네(夜深星斗暫徘徊) / 시냇물에 가을 달빛 밝음 생각하니(想得潭溪秋月白) / 이 인생 어느 날 다시 찾아올까(此生何日溯來).’ 우암이 공림사를 둘러본 뒤에 지은 ‘공림사중영회(空林寺中詠懷)’라는 시다. 가을에 녹아내리는 자연을 보면서 영욕의 세월을 곱씹었던 것 같다. 부활하고 싶다는 건지 윤회의 사슬을 끊고 싶다는 건지 본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삶에 대한 희망과 공포가 혼재한다. 자연이 공(空)하면 아름답지만 인간이 공하면 추하다.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한다.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고 욕하지 않으면 욕먹는다. 죽을 때까지 죽여야 하는 실존의 지겨움.

괴산=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72호/ 11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