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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의정부 망월사의 위안스카이

 

의정부 망월사의 위안스카이

  중화민국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가 썼다고 전해지는 망월사 현판.





산사 한편에 자리 잡은 人生無常의 흔적



지하철 1호선 망월사역의 이름은 망월사에서 따왔다. 역과 절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다. 여기서 3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망월(望月). 달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팍팍하지도 그렇다고 녹록하지도 않았다. 보폭이 길어도 1시간30분은 잡아야할 여정이다. 중력은 평소 산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게으름뱅이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애썼다. 심장은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가슴을 두들기며 만류했다. 그러나 세상과 부지런히 싸우느라 단련된 오기도 호락호락하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뒤엉킴 속에서 내가 나임을, 살아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兵火 시달리다 6ㆍ25때 전소

망월사는 서기 639년 선덕여왕의 명을 받아 해호(海浩)라는 스님이 창건했다. 경주의 월성을 바라보며 왕실의 흥륭을 기원한다는 취지에서 망월이라 명명했다고 전한다. 월성은 신라 임금들의 궁궐이었다.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설도 있다. 639년이면 한강유역을 일찌감치 점령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목전에 둔 시간대다. 한 나라의 최전방, 험한 산세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당시 망월사의 군사적 기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적군의 동태를 살피며 아군을 먹이고 재우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했으리란 생각. 망월사는 창건 후 여러 차례의 병화에 시달리다가 한국전쟁 때 전소되는 불운을 당했다.

오늘날의 망월사는 전쟁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종교나 여가를 즐길 목적으로만 활용될 뿐이다. 겨우겨우 올라간 보람은 컸다. 공기가 맑고 풍광이 훤하다. 의정부시 전체가 시야에 들어온다. 더 이상 기어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심장은 유순해졌다. 물론 사찰에 도착했다고 산길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파르고 협소한 공간 틈틈이 전각을 세웠고 이동하려면 반드시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낙가보전을 지나면 천중선원(天中禪院)의 드넓은 마당이 드러난다. 천중선원은 근현대 선지식 용성스님이 머물며 납자들을 가르쳤던 역사적인 선불장(佛場)이다.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한 춘성스님의 기운도 선연하다. 그야말로 하늘의 한가운데서(天中) 마음을 쓰다듬을 수 있을 만한 청정도량이다. 그래서 지장전에 걸린 망월사 현판이 더욱 이물스럽다. 세속을 비웃고 부처마저도 비웃었던 절대 자유에 초를 치는 물건이다.

<사진> 망월사 천중선원 전경.

망월사 지장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금은 지장보살을 모신 기도공간이지만, 본래 천중선원에서 정진하던 선객들이 내려와 밥을 먹고 쉬던 공양간이었다. 이름도 선적인 풍취가 깃든 무위당(無爲堂)이다. 무위당 편액 위로 ‘寺月望’라고 쓴 편액이 나란히 걸렸다. 뜨악하게도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의 글씨다. 편액의 좌측엔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 우측엔 ‘광서신묘중추지월(光緖辛卯中秋之月)’이라는 글귀가 세로로 쓰였다.

왕림 흔적 스스로 남기기도

광서는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였던 광서제(재위 1874~1908)를 뜻한다. 그가 재위할 당시의 신묘년, 서기로 따지면 1891년이다.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가 이 해 추석 무렵에 망월사에 다녀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쯤이다. 그가 절에서 무엇을 했는지 확인해 줄 사람은 없다. 100년이 넘는 세월과 한국전쟁을 용케 견뎌낸 편액의 내력도 우리무중이다.

다만 정사(正史)의 기록으로 편액과 관련된 그의 행적을 헤아릴 수는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위기에 몰린 명성왕후는 청나라에 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청조의 총리대신 리훙장(李鴻章)은 젊은 인재였던 위안스카이를 천거했고 그는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입국해 한성을 방위하는 책임자가 됐다. 이후 조선 주재 총리교섭 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에 부임해 한성에 살았다.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면서 적수로 떠오른 일본의 동정을 살피는 게 그의 임무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해 본국으로 도주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그러던 와중 서울 교외를 유람하다가 망월사에 들러 자신의 왕림을 스스로 기렸던 것 같다. 편액의 필체는 심심한 편이다. 문외한이 봐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위안스카이는 한국 불교계와 무관했다. 게다가 불교가 지향하는 정신과도 어울리지 않는 인격이었다. 그는 탐욕이 이끄는 길로만 골라서 다녔고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청일전쟁 이후 본국으로 복귀한 위안스카이는 톈진에 주둔하던 정무군에 파견된다. 정무군을 신식 병기로 무장한 신건육군(新健陸軍)으로 재편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군벌로 부상했다. 1898년 무술정변이 일어나자 개혁파 동지들을 배반하고 서태후의 아래로 들어가면서 대망(大望)에 접근했다. 이듬해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면서 절대 권력의 신임을 받게 된다.

 

죽음이 모든 것을 파괴할 줄 알면서도 발버둥치고 몸부림친다.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잘 분간도 안 된다.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맹목만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무심히 돌멩이도 차보고 꽃도 짓밟으면서 그렇게, 기어이, 간다.


반대파의 입김으로 잠시 주춤하던 위안스카이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생을 통째로 바꿀 기회를 맞았다. 무창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하자 조정은 그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 육군과 해군의 군권을 전부 넘겨주었다. 고양이에게 부뚜막을 맡긴 격이었다. 위안스카이의 대군은 수도 베이징으로 진격해 쿠데타를 성사시켰다. 그는 민주혁명세력의 수장이었던 쑨원(孫文)과 막후 협상을 벌여 자신을 초대 총통으로 선출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공화정 체제에 동의했다.

황제 오르려다 천심에 혼쭐

총통으로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4년 뒤 또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1915년 일본제국주의는 그에게 황제라는 조건을 걸고 ‘21개조’를 요구했다. 21개조란 1차 세계대전으로 여념이 없는 독일이 갖고 있던 산동성의 권익을 일본에게 넘겨준다는 것과,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매국적인 강요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전후사정 볼 것 없이 당근을 덥석 물었다. 1915년 12월 일본의 비호 아래 중화민국 연호를 폐지하고 중화제국 대황제가 되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그의 본색을 알아버린 민심은 분노했다. 제정(帝政)의 복고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우후죽순으로 일어났다. 자신의 계파마저 등을 돌리자 겁먹은 위안스카이는 득달같이 군주제를 취소하고 다음 기회를 노렸다. 요독증. 다음 기회가 오기 전에 죽음이 먼저 왔다.

“누구나 죽을 걸 알면서도 … 살잖아.”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오는 명대사다. 등산을 하면 인생의 모순에 대해 곱씹게 된다. 어차피 내려와야 할 길인데도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파괴할 줄 알면서도 발버둥치고 몸부림친다.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잘 분간도 안 된다.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맹목만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무심히 돌멩이도 차보고 꽃도 짓밟으면서 그렇게, 기어이, 간다.

의정부=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68호/ 10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