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저런얘기

춘천 청평사의 고려정원

 

춘천 청평사의 고려정원

 

 ▲ 11세기말 고려의 문인 이자현이 조성했다는 고려정원의 일부인 영지.

    



자연과 조화 이룬 ‘옛 사람의 공간’을 더듬다



소양호는 육지 안의 바다다. 1973년 소양강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면적과 저수량에서 국내 최대를 자랑한다. 개발이 곧 정의였던 시대를 기억하는 물들은 주로 인간의 유희를 위해서 이용된다. 소양강댐에서 청평사 국민관광지 사이는 배로 10분이면 가는 거리다. 여객선이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배는 낡고 촌스러웠다. 처음 물길을 가뒀을 때 지나다녔을 녀석이 지금껏 고생하고 있다. 모터소리가 터널을 뚫는 수준이다.

선착장에서 30분쯤 걸어야 절에 닿는다. 국민관광지라는 명성답게, 평일인 데도 행락객들은 수두룩한 편이었다. 은퇴자와 대학생, 노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계층으로 짐작된다. 사람들은 입으로 감자를 부치고 빙어를 튀겼다. 늙은 남녀들이 편을 먹었고 젊은 여자들끼리 뭉쳐서 다녔다. 낮술과 수다가 민물고기를 담아놓은 수조 속에서 부글거렸다. 정적은 길이 아스팔트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에 정확히 찾아왔다. 완만한 산길이 마음에 들었다.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구성(九聲) 폭포는 걸작이었다. 뱀을 사랑한 공주라는 해괴한 전설을 지나면 한층 현실적이었던 공간이 나온다. 이제는 폐허의 면전까지 다다른 현실이다. 영지(影池).

영지는 고려 중기의 문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조성한 정원의 부속이다. 오봉산의 고명인 경운산(慶雲山)의 그림자가 물 위에 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자현은 28세에 청평사에 들어와 정원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지냈다. <선기어록(禪機語錄)> <가송(歌頌)> <남유시(南遊詩)>와 같은 작품을 썼다. 그의 호는 식암(息庵) 그리고 청평거사(淸平居士)다.

식암은 오봉산 정상 부근의 암자로 그가 정원 내에 세운 8곳의 암자 가운데 하나다. 고려정원은 구성폭포에서 시작해 오봉산 정상 부근 식암 언저리까지 약 3Km 구간에 이르렀단다. 양산보의 소쇄원, 윤선도의 부용동보다 훨씬 앞선 계획형 정원이다.

오늘날 고려정원의 원형은 대부분 세월의 풍화에 덮였다. 춘천시에서 최근 복원계획을 꾸리고 있는 모양이다. 영지에서만 옛 풍경의 전모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다. 못물은 탁했고 이름모를 부초가 수북하게 자랐다. 단풍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가엾기만 했을 몰골이다.

<사진> 고려정원의 시작으로 알려진 구성폭포.

정원(庭園)의 사전적 의미는 ‘집안의 뜰이나 꽃밭’이다. 결국 집의 안과 밖을 경계로 자연을 갈라야 한다. 인간은 영역을 구분하기 위한 담을 치고, 담의 바깥에 있는 자연과는 사뭇 다른 자연을 창출했다. 특히 서양에서는 안팎의 차이가 큰 것이 미덕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경악하는 이유는 독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독보적으로 폐쇄적인 구조 때문이다.

나르시스의 후예들은 주변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별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사유지의 경계를 확정하고 잘난 신분을 자축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재벌 댁 앞마당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의 뜰은 그들의 눈만을 위해 존재한다. 반면 한국의 전통적 정원은 원림에 가깝다. 원림은 정원보다 열린 개념이다. 기존의 삼림을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을 세운 것이다. 인간보다 자연을 우위에 둔 배려다.

정원은 자연의 연장이었고 담은 성기고 낮았다. 아무리 좁고 하찮은 길이라도 인위적으로 방향을 트는 법이 없었다. 건물은 주로 외진 모퉁이에 세워 숲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 아닌 모두를 유혹하고 모두를 허락하는 공간이었다. 고려정원이 종적을 감춘 까닭 역시 고의적인 훼손 때문은 아닐 것이다. 본래 인간이 간섭한 자취가 적었기에 특별히 사라질 만한 것도 없었으리란 생각.

 

아무리 좁고 하찮은 길이라도 인위적으로 방향을 트는 법이 없었다.

건물은 주로 외진 모퉁이에 세워 숲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

고려정원이 종적을 감춘 까닭 역시 고의적인 훼손 때문은 아닐 것이다.

본래 인간이 간섭한 자취가 적었기에 특별히 사라질 만한 것도 없었으리란 생각.



스물여덟. 속세에서 뭐 하나라도 더 빼먹으려고 앙탈을 부릴 나이다. 그럼에도 이자현은 체념과 도피를 택했다. 정치적 실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자현은 그 유명한 이자겸(李資謙, ?~1126)의 동생이었다. 그가 청평사에 은거한 때는 1089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려면 37년이나 기다려야 한다. 형의 반란 실패로 몰락하기까지 이자현의 가문은 근 100년간 국권을 쥐고 흔들었다.

왕실과 권문세가에 거미줄처럼 맺어놓은 혼맥 덕분이다. 결국 자의적인 결단에 따른 은거였을 것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해 대서승(大暑承)까지 올랐으나 돌연 벼슬을 박차고 춘천 행을 결심했다.

이자현은 외모가 출중하고 총명하며 게다가 청렴하기까지 한 ‘엄친아’였다. 평소 그를 아꼈던 예종은 친히 조서를 써서 복귀를 간청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표문(表文)으로 정중히 물렸다.

◀ 오봉산 아래 위치한 청평사.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숲 속에 있고, 물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에 있다. 물고기가 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새까지 깊은 못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새가 숲을 사랑함을 가지고 물고기마저 깊은 숲으로 옮겨서도 안 된다. 새로써 새를 길러 숲 속의 즐거움에 내맡겨두고,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를 알아 강호의 즐거움을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어, 한 물건이라도 있어야 할 곳을 잃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제각기 마땅함을 얻도록 해야 한다(鳥樂在於深林 魚樂在於深水 不可以魚之愛水 徙鳥於深淵 不可以鳥之愛林, 徙魚於深藪 以鳥養鳥 任之於林藪之娛 觀魚知魚, 縱之於江湖之樂, 使一物不失其所, 群情各得其宜).’

일언반구를 불허하는 절창이다. 자신의 본분은 산인(山人)이며 그것은 임금도 어쩌지 못할 권리라고 점잖게 꾸짖고 있다. ‘밝음 가운데 어둠이 있거든 밝음으로써 만나려 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거든 어둠으로써 보려 하지 말라. 밝음과 어둠이 상대됨은 마치 앞뒤의 발걸음 같은 것. 만물은 제각기 공능(功能)이 있으니 용도에 맞는 곳을 말해야 한다(當明中有暗 勿以明相遇 當暗中有明 勿以暗相覩 明暗各相對 譬如前後步 万物自有功 當言用及處)’던 당대(唐代)의 선사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의 가치관과 고스란히 겹친다.

이자현은 이후 청평사에서 머리를 깎지 않은 선사로 살았다. 물론 암자를 짓고 정원을 꾸민 것을 보면 얼마간의 돈줄은 끊지 않고 놔뒀던 듯하다. 어쨌거나 재벌 2세가 산 속에 파묻혀 글이나 쓰고 살겠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계급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콧대를 꺾는 반전이다. 그나마 세상에 이런 일탈이 있어 속이 트인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승의 이자현이 고려정원의 몰락을 아쉬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모든 정원은 본래 폐허였으니까. 부처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고 부처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 구성폭포 아래로 낙엽이 흐드러졌다. 다시 가을이 왔고 만물은 어김없이 썩을 준비를 한다.

춘천=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70호/ 10월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