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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의성 고운사의 가운루

 

의성 고운사의 가운루

 

  천년고찰 고운사의 중심에 자리한 누각 ‘가운루’.





‘독야청청’홀로 선 그 절에 깃든 ‘화엄’의 여운




고운사(孤雲寺)는 이름처럼 외롭다. 대구에서 출발하면 차량으로 1시간20분을 달려야 한다. 절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약도는 유난히 설명이 길다. 기차 고속버스 시외버스 지선버스 택시 … 거의 모든 교통수단을 언급했다. 길의 시작을 제외하면 온통 정적이다. 심연으로 들어가는 낭하와 같이 좁고 깊었다.

한때는 366칸의 건물에 200명의 대중이 살았다. 해방 이후 급격히 쇠락했다. 사람이 들어와 건드리지 않은 탓이다. 박색(薄色)인 길은 유혹에 서툴렀다. 화(禍)가 들어오지 않는 길엔 복(福)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경북의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을 관장하는 절이다. 명색이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지만 본사 가운데 가장 작다. 말사인 부석사가 훨씬 더 유명하다. 입사 7년 만에 처음 가 본다.

고운사는 이름처럼 맑다. 외로워서 맑다. 대찰에 있기 마련인 사하촌이 형성되지 않아 풍경이 일절 상하지 않았다. 솔밭으로 물든 옛길 그대로다. 청정하고 도도하다. 본래는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스님은 부용반개형(芙蓉半開形,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의 명당에 법당을 앉히고, 삼국통일을 갓 이룬 모국의 융성을 빌었다. 원효가 극락의 바깥으로 탈주해 또 다른 극락을 일깨웠다면, 의상은 극락의 안에 머물며 극락을 살찌운 스님이다. 학문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한 조각의 흠결을 용납하지 않았다.

선(禪) 체험관을 건립하고 수월암을 복원한 주지 호성스님은 중흥불사로 분주하다. 학승의 산실이었던 강당도 다시 지을 참이다. 스님은 “의상대사를 닮은 사찰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말했다. 수월암은 수월영민 선사(水月永旻, 1817~1893)가 거처하던 암자다. 입적했을 때 무려 64과의 사리가 나왔다는 전설적인 선지식이다. 제자들이 부도탑을 세워드리겠다고 건의하자 “모양이 본래 있느냐”며 물렸다. 열반을 앞두고 스님은 제자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당부했다. 빈소를 차리지 말 것, 다음날 낮에 곧바로 화장할 것, 절대 울지 말 것.

도선국사(道詵國師)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다. 한국 풍수지리학을 창시한 당신이 절을 가만 놔뒀을 리 없다. 이때 가람이 크게 일어났다. 오법당십방사(五法堂十房舍, 5동의 법당과 10동의 요사) 크기로 절을 키웠다. 약사전 안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이 스님의 작품이다. 절은 길한 지세와 도승(道僧)의 신력에 힘입어 지장보살의 영험이 돋보이는 성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먼저 묻는단다. 고운사 참배 여부가 사면과 처벌, 감형과 혹형을 가르는 중대한 증거였던 셈이다. 까마득한 명부(冥府)에서도 주목할 만큼 고운사는 깨끗했다.

의상과 도선 사이의 역사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혔다. 그는 여지(如智)와 여사(如事)라는 스님과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雨華樓)를 건축했다. 고운(高雲)이 고운(孤雲)으로 바뀐 이유도 그의 영향 때문이다. 가운루는 예나 지금이나 고운사의 중심이다.

 

가허루는 수행자라는 직분을 지녔다면

반드시 가야할 길을 가르치는 표지였다.

허(虛)는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그런데 멍에를 쓰듯(駕), 불성을 짊어지고 가란다.

가(駕)는 평생토록 오롯이 간직해야 할 계율과 습의를 가리킨다.

청아하되 허술하지 않고 고독하되 청승떨지 말지어다 …

누각 위에 서서 순수하고 굳센 자연을 본받으라는 교시가 담긴 문자다.

 

길이 16.2m 높이 13m에 달하는 대규모 누각이다. 경내의 중앙을 가로질렀기에 올라서면 절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3쌍의 가늘고 긴 기둥이 계곡 아래부터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기둥의 길이가 조금씩 다른 데도 알찬 균형을 이뤘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현재의 가운루는 1668년에 중수한 것이다. 우화루는 절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가운루의 왼쪽에 세로로 섰다. 가운루와 달리 사방이 문으로 막혔고 요즘은 도서관과 창고를 겸해 쓴다. 가운루와 우화루는 ‘ㄴ’ 모양으로 배치됐고 커다란 웅덩이를 감싼 형국이다. 웅덩이는 과거에 연못이었지만 지금은 물이 완전히 말랐다. 가운루 아래를 흐르는 계곡에도 물은 자국만 남은 정도다. 만성적인 가뭄의 자리엔 마른 낙엽만 무성하다.

사찰명처럼 가운루와 우화루의 이름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뒤틀렸다. 가운루는 원래 ‘운’ 대신 ‘허(虛)’를 썼고 우화루는 음은 같지만 뜻은 다른 낱말로 채워졌다. 우화(羽化)였다. 가허루는 수행자라는 직분을 지녔다면 반드시 가야할 길을 가르치는 표지였다. 허(虛)는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그런데 멍에를 쓰듯(駕), 불성을 짊어지고 가란다. 가(駕)는 평생토록 오롯이 간직해야 할 계율과 습의를 가리킨다. 청아하되 허술하지 않고 고독하되 청승떨지 말지어다 … 누각 위에 서서 순수하고 굳센 자연을 본받으라는 교시가 담긴 문자다. 가허에 의상이 지향했던 모범이 아로새겨졌다면, 우화(羽化)엔 ‘박제된 천재’의 대명사인 최치원의 장탄식이 숨쉰다. 신선. 불안하고 불평등한 현실의 등쌀에 밀려난 그가 대업 대신에 꿈꾼 대몽이다.

고운은 12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스물도 되기 전에 과거에 급제하는 쾌거를 올렸다. 성공적인 조기유학은 사실 자의보다는 타의에 가까웠다. 모국에선 아무리 잘 나도 도저히 ‘뜰’ 수가 없었다. 고운은 6두품이었다.

골품제는 신라 사회의 근간이었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유지된 시스템이다. 귀족이었던 성골과 진골을 비롯해 6두품에서 1두품까지. 벼슬의 고하뿐만 아니라 혼인의 대상,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 걸쳐 특권과 제약이 갈라졌다. 6두품은 나름 지배층이었지만 지배할 수는 없는 애매한 계급이었다. 귀족은 6두품에게 자신의 오른팔이 되는 것까지만 허락했다. 나라를 관리할 순 있어도 통치할 순 없었다. 팔자가 꼬인 ‘경계인’ 몇몇은 고약한 풍습을 등지고 권력의 외곽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다. 유독 6두품 출신 예인이나 학자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란 설이 있다.

885년 고운은 서른을 앞두고 신라로 돌아왔다. 이미 황제로부터 어대(魚袋)를 하사받고 ‘토황소격문’으로 중원에 문장가의 이름을 떨친 ‘귀하신 몸’이었다. 자신의 능력과 위신이라면 나라를 바꿀 수 있으리란 패기와 오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이었고 때 이른 귀환이었다. 진성여왕에게 국정쇄신안을 담은 시무책 10조를 건의했다가 여지없이 퇴짜를 맞았다.

핵심은 물론 골품제의 폐지였다. 골품제는 임금도 어쩌지 못하는 천명과 같은 것이었다고 본다. 진성여왕이 평생 독신으로 일관한 까닭도 왕실에서 성골 출신의 배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란 짐작이 있다. 잔뜩 삐친 고운은 이후 조정을 멀리하고 외직으로만 돌았다. 그가 역사에 남긴 눈부신 글귀들은 결국 좌절의 산물이다. 그는 실패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다.

최근 고운사는 절 입구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조경으로 꾸몄다. 법계도는 의상대사가 자신이 바라본 극락을 도식화한 문양이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미로의 모습을 띄었다. 처음과 끝이 하나로 만난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해 소용돌이를 그리며 뻗어나가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나는 7언 30구 210자는 세상을 견디는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하나(一) 안에 전부(一切)가 있으며 많음(多)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전부요 많음이 곧 하나다. 작은 티끌 안에 세계의 전체가 들어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둥글게 살아라. 살았다고 잘된 것 아니요 죽었다고 끝난 것 아니다.

고운사=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74호/ 11월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