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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제주 서관음사의 ‘4.3’

 

제주 서관음사의 ‘4.3’

 

  제주 4.3 사태 당시 전소된 서관음사 터에 남아 있는 폐가.

 

제주 4.3의 상황은 출구가 없는 방에 쥐와 고양이가 함께 갇힌 꼴이었다. 국가로부터 ‘저들은 사람이 아니니 일껏 죽여보라’는 명령을 받은 공권력에게 눈과 귀가 가려진 섬사람들은 생전에 다시없을 먹잇감이었다. 정의는 간단했다. 총칼을 갖고 쪽수가 많은 쪽이 선이었고 그렇지 못한 쪽이 악이었다. 인륜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80년의 광주는 목숨을 걸면 길을 뚫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망망대해는 단 한줌의 인정과 정보도 용납하지 않았다. 손발이 묶인 섬은 지옥이었다.




뭍에서 넘어온 탐욕, 극락을 지옥으로 만들다

 

조계종 총무원이 2004년 6월 발행한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제주도편’에는 ‘4.3’의 개요와 그에 따른 불교계의 피해가 상세하게 수록됐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3일 일어났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 500명의 무장봉기가 발단이었다. 미군정은 이를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당시 단선반대 운동은 남한 전역에서 벌어지던 소요였다. 제주도의 무장투쟁 수준이 뭍의 그것보다 극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은 제주도의 상황에 유독 심각하게 반응했다. 곧바로 본토에서 1700명의 경찰과 부산에 주둔하던 군대를 급파하곤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결정적 계기는 진압군과 함께 입도한 경찰, 그리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 때문이다. 제주도민과 연고가 없는 경찰들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주민들에게서 금품을 뜯어 부족한 봉급을 벌충했다.

월남한 피난민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그나마 무보수였다. 공산당이라면 이를 갈거나 가는 척하는 단원들은 갖은 공갈과 폭력으로 주머니를 채웠다. 극심한 실업난과 대흉년, 전염병으로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했던 제주 사회였다. 주민의 안전을 지키라고 보낸 공무원들은 오히려 삶의 터전을 망가뜨렸다. 이들의 만행으로 도민들은 정부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됐다.

살상과 착취에 견디지 못한 민중들이 속속 입산하면서 무장대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진압작전 초기엔 정부군이 밀렸다. 미군정은 모슬포에 머물던 국방경비대 9연대에 즉각적인 진압을 지시했다. 경찰과 극우세력의 횡포, 급격하게 일이 커지게 된 이유를 알았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을 만나 ‘72시간내 모든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상을 체결했다.

유혈사태는 여기서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조병옥 경무부장의 지시를 받은 매복 경찰이 산에서 내려오던 무장대와 입산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면서 평화는 문턱에서 넘어졌다. 김익렬 중령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해임됐다.

후임으로 온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로 제주에서 근무했었다. 부친은 친일단체의 주요간부 출신이었다. 그는 연대장 취임연설에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토벌대장의 마인드가 이러하니 파국은 불 보듯 뻔했다. 남한의 기득권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먼 백성을 몰아세웠다. 민족의 해방을 방해했거나 별달리 기여한 게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이념을 들이댔다. 자신들의 비열한 호의호식을 가로막는 세력들은 모두 빨갱이였다. 그들의 계획대로 단독선거는 무사히 치러졌지만 진압은 한층 거세졌다.



오늘날 서관음사는 과연 절이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다. 사지(寺址)에

흔히 보이는 당간지주나 주춧돌조차 없다. 허름한 외층짜리 시멘트 건물

하나만 숲 속에 짓이겨져 버려졌다. 이마저 폐사된 뒤 19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나라에서 유일하게 야자수를 자라게 하는 남녘의 햇살이 흉가에

번졌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죽음을 자연이 챙겨주고 있었다.



이제부턴 보복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0월 해안선을 봉쇄했고 11월엔 계엄령을 선포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삼진정책으로 집단 학살을 합법화했다. 빨갱이마을로 지목되면 부녀자와 아이까지 남김없이 죽였다. 현직검사와 법원장, 언론인 같은 인사들도 예외가 없었다. 살인에 토를 달면 죽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주춤했던 학살이 다시 활개를 쳤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가담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훈방됐던 사람들까지 잡아들여 죽였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죽였고 ‘군경과 서북청년단에 비협조적’이라며 죽였고 ‘가족 중 입산자가 있었다’며 죽였다.

이렇게 3만명이 죽었다. 휴전 이후인 1954년 9월21일 제주도 경찰국장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면서 살육은 6년5개월 만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3만명이면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다. 도내에서는 수십명에 달하는 마을 어른의 제사를 같은 날 치르는 동네가 적지 않다. 그 날이 끌려간 날이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도민 전체가 유가족’이란 하소연도 목격했다. 입에 담는 일도 사치로 여겨지는 악몽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강경토벌 성과로 대령으로 진급한 박진경이 부하에 의해 살해됐다는 정도. 여기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제주 출신 경비대원 100명이 죽었다.

<사진> 서관음사 터에 있는 우물.

제주도 사찰의 피해도 극심했다. 조계종 23교구본사 관음사를 비롯해 35곳의 사찰이 전소됐다. 26곳은 복원됐고 나머지는 여전히 폐허다. 제주시 도평리의 서관음사(西觀音寺)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절터에 지금은 감귤농장이 들어섰다. 거대한 레미콘공장이 인접해 있다. 서관음사가 위치한 일대의 토양은 기와나 벽돌을 굽기에 적당했다.

서관음사를 중창한 이세진스님은 사내에 기와공장을 세울 만큼 개명했다. 스님은 1939년 관음사포교당인 대각사에 제주강원을 설립해 학인들을 양성하는 등 근대 제주불교를 대표하는 강사였다. 서관음사는 1945년 제주불교승려대회의 중추였던 오이화, 이일선, 원문상스님들의 지대방이었다. 마을의 선각자들이 시국을 토로하던 장소였던 절은 도평리 마을주민 80여명이 학살되던 1949년 1월3일 방화됐다.

무장대로 변장한 경찰과 군인들은 주민들을 소집해 도평국민학교로 몰아넣은 뒤 무차별 총격을 자행했다. 학살을 마친 토벌대는 아랫마을로 내려오면서 불을 질렀다. 맨 처음 불탄 건물이 서관음사다. 이세진스님은 4.3 발발 직후 도당사령부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에 붙잡혔고 제주항에서 수장됐다.

오늘날 서관음사는 과연 절이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다. 사지(寺址)에 흔히 보이는 당간지주나 주춧돌조차 없다. 허름한 외층짜리 시멘트 건물 하나만 숲 속에 짓이겨져 버려졌다. 이마저 폐사된 뒤 19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나라에서 유일하게 야자수를 자라게 하는 남녘의 햇살이 흉가에 번졌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죽음을 자연이 챙겨주고 있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싶은 마음과 인간답고 싶은 마음, 남을 이기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혼재하는 동물이다.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비와 광기가 교대로 나타난다. 거기엔 순서도 없고 확률도 무의미하다. 천방지축 중구난방의 연속이다. 이런 인간이 이념을 만들고 역사를 만든다.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상황은 역설적으로 최선의 상황도 꽃피울 수 있다는 반증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은 그렇게 두렵고 설렌다.

제주=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27호/ 5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