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숭림사의 달마 |
‘마음 밖에 불성은 없다(心外無佛性).’ 앞 부처님과 뒤 부처님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을 뿐 문자는 세우지 않았음이라(三界混起 同歸一心 前佛後佛 以心傳心 不立文字).’ 선의 태동이자 조계종의 골격이다. 스님은 서기 495년에 입적했다. 436년이나 528년에 열반했다는 설도 곁으로 전한다. 입적의 시기 뿐 아니라 입적의 형식에 대해서도 추측이 분분하다. 바람 같은 행적과 괴이한 생김새 덕분에 달마는 영험의 상징으로 오래도록 전승됐다. 물론 전설적 선지식이 남긴 게 거대한 달마도 시장만은 아니었다. <사진> 보광전 천장의 닫집. 어이없는 말장난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숨어 있던 해학이 드러난다. 강과 뗏목은 각각 흐른다(流)와 버틴다(支)는 뜻을 내포한다. 거기에 삼장(三藏)과 비슷한 모양의 옥 물결(玉浪)을 보태면 보리류지 삼장이 된다. 횃불은 빛난다(光)는 뜻이고, 연다는 건 통(統)자의 의미다. ‘열다…소통하다…총괄하다’ 쯤으로 연상하다보면 그럴듯하다. 곧 광통을 빗댔다. 금쇄(金鎖)는 독약을 암시한다. 독약도 자물쇠처럼 목숨을 완전히 잠가버리니까. 요컨대 고도의 비유로 암살자를 에둘러 밝히고 있다. 죽을 때까지 정적의 실명을 밝히지 못할 만큼 기구한 사연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핵심은 다음 구절에 있다. 오구(五口)는 ‘나 오(吾)’자를, 구십(九十)은 ‘마칠 졸(卒)’자를 파자한 것이다. ‘(그들이) 나와 함께 불법을 펴다 시기하는 마음을 내어 싸웠지만, 세상을 하직할 때가 되니 너입네 나입네 따지고 으르렁거릴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여유이자 용서다. 쇼는 웃겼으되 울면서 갔지만 스님은 웃기고 웃으면서 갔다. ‘(그들이) 나와 함께 불법을 펴다 시기하는 마음을 내어 싸웠지만, 세상을 하직할 때가 되니 너입네 나입네 따지고 으르렁거릴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여유이자 용서다. 반면 한국 선의 발원으로 공인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은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나타났다. 경덕왕 당시라면 너무 빠르고 충목왕 당시라면 너무 늦은 셈이다. 서해와 맞닿은 지리적 특성에 기대어 만들어낸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1345년 이후는 기록이 확실하다. 백제는 익산 인근의 포구 웅포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발 빠르게 흡수했다. 불교문화 역시 바닷길로 들어왔다. 대표적인 지역유물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북사(北史)>나 <수서(隨書)>와 같은 중국의 사서들은 “백제엔 승려와 절, 탑이 많다”고 했다. 문헌이 거론한 사찰은 미륵사(彌勒寺)를 비롯해 수덕사(修德寺),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사자사(師子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곳. 오늘날 예산 수덕사말고는 모두 사라졌다. 교외를 벗어나기 직전쯤에 원불교 중앙총부를 만났다. 1924년 9월 원불교의 교조 박중빈이 교법을 완성한 후 교화 기지로 건립한 곳이다. 4000평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10만평이 넘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담벼락은 정확히 25배 성장한 교단의 다부진 영역 표시처럼 느껴졌다. 숭림사 주지 지광스님은 “인구는 33만에 불과한데 교회는 600여개인 동네가 익산”이라고 말했다. 숭림사는 종교마저 서로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자본의 지대로부터 멀찌감치 비켜서 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으니.’<혈맥론> 입에 문자를 담지 않는 절은 어디나 언제나 조용하다. 조용해야 절이다. 옛 사람들은 부처님을 위해 천장을 꾸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닫집을 설치하는 목적은 불국(佛國)의 성스러움을 법당에 재현하는 것이다. 지광스님은 20년 넘게 절을 지켰다. 숭림사는 불교정화운동 이후 한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다. 거의 모든 문화재를 도둑맞았다. 들고 갈 수 없는 보광전(普光殿, 보물 825호)만 몸을 건사했다. <사진> 보물 제825호 숭림사 보광전. 17세기 무렵에 지은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성보다. 보광전의 닫집은 놀라웠다. 수평의 미학에만 길들여져 수직도 그만한 성적을 낼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보광전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자신이 지닌 또 다른 조형미를 과시했다. 우선 나무를 세밀하게 조립한 태가 압권이다. 들보에는 용의 머리 위로 봉황이 난다. 신화 속의 동물들은 여기가 극락이요 열반임을 웅장한 몸짓으로 천명하고 있다. 닫집 한편의 용은 내려가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눈망울을 희번덕거렸다. 멀리서 보면 무섭지만 가까이서 보면 웃긴다. 그게 허상이란 걸 알기 때문이고 내려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보광전엔 수많은 인등이 걸렸다. 법당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등을 내다치우면 눈부신 만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불을 켜고 끄는 일처럼 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웃을 일이 많겠는가. 그 많던 꽃잎을 시간에 죄다 빼앗기고 진부한 녹색으로 연명하는 벚나무는 또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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