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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밀양 표충사의 산들늪

 

밀양 표충사의 산들늪


산들늪은 물들의 낙원이다. 재약산 정상에 위치한 국내 최대의 고산습지다. 표충사 매표소에서 차로 20분쯤 올라가면 만난다. 60만㎡(18만평) 규모로 해발 700m에서 1000m에 걸쳐 있다. 826만㎡(250만평)에 달하는 산악 평원지대 사자평의 일부다. 산이 들과 같이 넓게 펼쳐졌다 해서 ‘산들늪’이다. 7000만년전 화산폭발로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에게 정복돼 본 적 없는 시원의 공간이다. 생명들은 여기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어울렸으며 자기들끼리 나고 죽었다.





인간이 멸종된 그곳서 또 다른 윤회를 보다


순환ㆍ응축의 늪지대, 그 안에서 나고 지는 생명



낙동강유역환경청 자연환경과 이수완 팀장의 안내로 한 바퀴 돌았다. 산바람은 상쾌했지만 산들늪의 목초들은 아직 봄을 만나지 못했다. 겨우내 말라붙은 억새들의 도열은 금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형국이다. 눈으로만 봐선 이 곳이 늪이라는 걸 가늠하기 어렵다. 걸어보면 안다. 잔뜩 물먹은 솜뭉치를 밟는 느낌이다. 이탄(泥炭) 때문이다. 이탄은 산들늪 토양의 주성분으로 죽은 동식물의 형해와 진흙이 뒤엉켜 만들어진다. 갯벌의 흙처럼 축축하고 고와서 수분을 붙잡고 있기가 용이하다. 그런 이탄이 1.5m 높이까지 쌓였다. 표면만이 아니라 뼛속까지 흙길인 셈이다.

<사진> 산들늪 웅덩이의 비단개구리알.

이수완 팀장은 “이탄이 1cm 축적되려면 100년에서 200년이 걸린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라고 말했다. 늪은 아득한 세월 제 몸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몸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4대 문명에서 보듯 인류는 물을 끼고 번성했다. 사람 이외의 종들도 마찬가지다. 산들늪엔 360여종에 이르는 동식물이 살아간다. 생존을 위한 경쟁과 적응의 역사는 여기도 복잡하고 힘겹다. 습지 한편엔 진퍼리새와 삿갓사초가 무더기를 이뤘다. 고산습지 지표종으로 이것들이 서식해야 고산습지로 공인받을 수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애매한 물건들이다.

진퍼리새는 누워서 널브러져 있고 삿갓사초는 얼핏 농부가 삿갓 모양으로 쌓아놓은 볏짚의 형상이다. 그러나 봄볕이 무르익으면 진퍼리새는 푸른빛으로 벌떡 일어서고 삿갓사초는 정수리에서 꽃을 피운단다. 웅덩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실뱀도 갸륵한 혹은 가련한 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3cm 길이의 청회색 괴생물체로 아직 학자들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딱 이불 꿰매는 실의 굵기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물을 휘젓자 가지를 휘감고 부득부득 버틴다. 한편에선 비단개구리알이 돌 틈에 숨어 조용히 출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투명한 우무질에 싸인 검은 수정란들은 더러우면서 귀여웠다.

전문가들은 사자평 중앙부를 가로지른 계곡 때문에 습지 생물들의 영구적인 종족번식이 가능한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사자평 습원의 물줄기는 멀리로는 영남 전역의 젖줄인 낙동강의 수원지이자, 30만 지역주민의 식수인 밀양댐과 직결된다. 산들늪에는 다른 산지습원에서 전혀 볼 수 없는 1급수 지표종 버들치가 다량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역시 1급 청정수에서만 생존이 가능한 가재, 계곡산개구리, 한국 특산종 장지뱀, 까치살모사, 꼬마잠자리 등이 원시상태의 생태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해외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식충식물 끈끈이주걱까지 산재하는 곳이다. 민찔레, 겹미나리아제비, 민계요동 같은 변종식물도 나타난다.

표충사, 생태계 보존위해 ‘습지보호지역’ 요청

처음 듣는 이름들은 여기가 사람에게 익숙지 않은 공간임을 시사한다. 물의 끊이지 않는 순환과 응축으로 인해 산들늪은 열리면서 닫힌 공간적 특성을 지니게 됐다. 전체적으로 물길이 흐르면서 질서가 잡힌 반면 부분적으로 물길이 멈추면서 각종 돌연변이들이 출현했다. 물이 차고 넘쳐 생물들에겐 비옥한 터전인 반면 물이 너무 많아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결국 두 손 들고 떠나버렸다. 물이 얼마나 많은지 웅덩이 바로 위쪽에서 뜀을 뛰면 웅덩이에서 물거품이 일었다 꺼졌다. 산들늪에 혼재하는 동이(同異)는 물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산들늪은 표충사의 요청으로 2006년 12월28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환경부고시 제 2006-213호). 자기 땅에 집 한 채라도 더 지으려는 세태에서 토지 소유자가 자진해서 개발을 금지한 첫 사례로 세간의 귀감이 됐다. 표충사 주지 청운스님은 이 일로 세계 습지의 날 기념행사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사자평은 이른바 ‘영남알프스’에 속한다. 영남알프스는 밀양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에 걸친 고도 1000m 이상의 산군(山群)을 가리킨다. 유럽의 알프스 버금가게 풍광이 훌륭하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지자체와 기업들이 산하를 가르고 부순 뒤 그 자리에 골프장과 콘도를 들이밀었다. 산들늪의 보호지역 지정은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개발주의로부터 야생을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사진> 국내 최대 규모의 고산습지인 산들늪 전경.

좀더 구체적인 계기는 늪의 정기를 야금야금 갉아먹던 도로 때문이다. 1970년대 무장공비가 청도까지 침투했을 때 당국은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산들늪에 작전도로를 개설했다. ‘작전’이 끝난 뒤 한참동안 방치되던 비포장도로는 차량의 숱한 왕래와 폭우로 꺼져 내렸고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계곡으로 변신한 길은 수맥을 헝클어뜨렸고 물길을 무너뜨렸다.

10월 한국서 ‘람사총회’…세계습지 등록 추진

산들늪은 오는 10월 한국에서 최초로 열릴 람사 총회를 통해 세계 습지로 등록될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협약에 따라 산들늪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한국 정부는 습지 복원에 나서야 한다. 청운스님은 “자연이 무너지면 결국 거기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며 “앞으로 생태계의 훼손행위를 철저히 감시하고 주기적인 자연환경 정밀조사와 모니터링으로 산들늪을 온전하게 보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사자평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거엔 굵직굵직한 인간사에 가끔씩 가담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키던 곳이었고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이 점유하고 살았었다. 화전민의 자녀들이 다니던 고사리분교는 1996년까지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됐다. 원래 먹고살기 팍팍한 땅이었던 데다 보호구역이 되면서 인적을 말끔히 비워냈다. 산들늪에서 인간은 멸종됐다.

인간 이외의 것들도 매한가지였다. 삼라만상의 집합소라지만 그들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거의 발설하지 않았다. 다만 인기척을 느끼자 소란스럽게 달아나는 고라니에게서 그들의 고단한 생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건 여전히 반쯤은 겨울인 황량한 숲이었고 귀로 들어오는 건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결국 습지는 재미없는 곳이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들늪에 산다는 이름도 모양도 신기한 생물들도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기상천외한 UCC에 비하면 별반 놀랄 일도 아니다. 입과 손을 가진 자들이 벌이는 삶의 양태가 훨씬 다채롭고 아름다운 건 당연지사다. 물론 입과 손이 생산한 즐거움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고 손쓰기 어려운 고통의 원인이자 결과다. 죄악 역시 눈부시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진화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늪의 생명들 역시 삶은 고역이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군림한 황조롱이나 살쾡이 따위 말고는 나날이 걱정이고 사고다. 하지만 수천만년을 두고 늪의 종들은 비슷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했고 비슷한 방법으로 잡아먹는다. 진화하지 않는 그들의 고통이 부럽다. 땅 밑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그들의 생사(生死)를 알면서도.

밀양=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17호/ 4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