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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순창 만일사의 고추장

 

순창 만일사의 고추장

 

<사진> 만일사 앞마당에 늘어선 장독대.

‘순창’하면 ‘고추장’이다. 만일사는 순창고추장의 시원지다. 내력은 이렇다. 어느 날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가 머물던 만일사를 찾아가다 순창의 한 농가에 들렀다. 거기서 점심을 먹었는데 고추장 맛이 기가 막혔다. 훗날 왕좌에 오른 이성계는 그 날의 그 맛을 수라상에 올리라 명했고, 순창고추장은 역사적인 특산품으로 등극했다. 절 한편에 자리한 만일사비(碑)의 내용이 옛일을 말해준다. 마멸이 심해 지금은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비문엔 만일사의 유래에 관한 구절도 들어 있단다.



구중궁궐 임금님도 탄복한

구중산골 자연이 빚은 장맛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개국(開國)을 위해 1만일 동안 기도정진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이면 어림잡아 27년이다. 사실보다 은유가 전설의 속성임을 감안해도 쉬 믿기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만일(萬日)이란 이름에서 남도에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열을 봤다.

괜히 태양초겠는가. 여하튼 순창군은 오늘날 군을 먹여 살리는 효자상품을 있게 한 만일사를 위해 경내에 고추장 전시관을 짓기로 했다. 부처님오신날 직후 삽을 떠 연말이면 완공할 예정이다. 버스터미널 인근엔 순창고추장 민속마을이 조성돼 제대로 매운맛이 그리운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집집마다 고추장 천지다.

만일사에서도 고추장을 담갔다. 해마다 2월말이면 절 아래 산안마을에서 할머니들이 올라와 ‘마을의 자랑’을 빚었다. 한때는 만일사 텃밭에서 고추를 직접 재배했었다. 한번에 600킬로그램씩 푸지게 담가 이웃과 나눠먹고 외지에 팔기도 했다. 된장도 같이 만들었다.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노파들은 여남은 명씩 절에 모였다. 고추장을 담그기 알맞은 길일은 십이간지 중 말(馬)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그날 해야 장맛도 좋고 이물질이 끼지 않는다는 풍설 때문이다. 일꾼들은 평생 동안 식구의 입에 넣을 찬을 준비하다가 저도 모르게 장류를 터득한 사람들이다. 고추장처럼 온몸이 곰삭은 그들은 로봇보다 부지런한 몸과 컴퓨터보다 정확한 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사흘 밤낮을 두고, 땡볕에 바싹 말린 고추에 찹쌀과 메주를 섞고 굵은 소금을 덮었다. 장독에 담아 90일에서 100일을 숙성시키면 임금이 격찬했던 진미가 탄생했다.

절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된장은 해두었지만 고추장은 준비하지 못했다. 고추값이 콩값보다 2~3배는 비싼 데다, 된장과 같은 양의 고추장을 만들려면 콩보다 훨씬 많은 고추를 투입해야 하는 탓이다. 된장에 비해 손이 유난히 많이 가는 점도 작업에 애를 먹인다. 된장은 공기와 습기가 약이 되는 반면 고추장은 독을 여닫거나 침이 묻은 숟가락이라도 꽂으면 금세 맛이 상한다. 물론 아무리 까다롭고 고된 일이라도 뜻이 맞고 사람만 많다면 어떻게든 이뤄지는 게 이치다.

이젠 고추장을 담그려야 담글 사람이 없는 게 문제다. 30여 가구가 사는 산안마을은 대부분 독거노인이 사는 1인 가정이다. 고무장갑에 장을 찍어먹으며 왁자지껄하던 아낙들은 구십줄에 다다른 노구로 임종의 문고리를 잡고 섰다. 절에서도 앞으로는 고추장마을에 원료만 가져다주고 제작은 대행해서 먹을 생각이다. 만일사 앞마당에 가지런히 늘어선 빈 장독대만이 붉은 추억의 표식이다.

말 그대로 산 안에 있다는 뜻의 산안마을은 강원도 두메산골에 필적할 만큼 험한 산세다. 만일사가 위치한 회목산 정상은 해발 630미터 남짓이다. 고도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넓이와 깊이가 높이의 위세를 대신했다. 바위산의 두툼한 혈맥들은 논밭을 파먹고 구름을 삼켰다. 평일날 아무도 찾지 않는 만일사에 오르면 절대고독을 느낄 수 있다.

순창은 한국전쟁 무렵 빨치산의 총본산이었고 회목산은 그 중에서도 알짬이었다. 엄폐가 확실한 데다 민가가 멀지 않아 군진(軍陣)으로 삼기에 제격이었다. 빨치산은 회목산에서 봉기해 활동하다 쫓기고 쫓겨 지리산까지 파고들었다. 회목산은 국군과 빨치산의 격전으로 불바다가 됐었다. 정말 온 산이 고추장처럼 벌겋게 익었다는 전언이다. 1급수에서만 서식하는 다슬기가 지천에 널릴 만큼 물이 맑지만 암석들은 하나같이 검고 칙칙하다.

고추장을 담그는 시기가 추운 겨울이어서

당화(糖化) 속도가 느리고 유산균의 번식이 더뎌

신맛을 내지 않고 감칠맛이 생긴다.

순창은 고추장의 맛을 좌우하는

효모균이 자라기에도 최적의 기후이다.



순창고추장은 섬진강 상류의 지하 암반수로 빚는다. 순창은 예로부터 옥천(玉川)골로 불릴 만큼 물이 좋은 고장이었다. 진하고 깔끔한 장의 뒷맛은 물맛 덕분이란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순창고추장은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농산물로 제조한다.

국내의 토양 온도권은 크게 온대권(8∼15℃)과 열대권(15∼20℃)으로 압축된다. 온대권의 상한계와 열대권의 하한계 토양온도는 15℃에서 만난다. 15℃를 중심으로 온대권과 열대권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은 고창 - 순창 - 남원 - 하동 - 사천 - 진양 - 함안 - 김해 - 양산 - 울주 - 영일을 잇는 선이다. 순창은 바로 온대권과 열대권의 접경에 자리했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해역에서 만선을 기대할 수 있듯 순창의 토양은 온대와 열대가 갖고 있는 양분의 총화다.

순창고추장은 다른 지역과 만드는 시기가 다르다. 여기선 처서 전후에 메주를 띄워 음력 동지섣달 전후에 고추장을 담근다. 타지에선 으레 음력 10월에 메주를 쑤어 곧바로 메주를 띄우지만 순창에서는 음력 7월 전후(양력 8~9월)인 여름철에 고추장용 메주를 별도로 만든다. 장의 단맛을 내는 곰팡이의 경우 온도가 높을수록 많이 번식한다는 이유에서다. 메주를 충분히 발효시켜 이듬해 봄에 담그고 고추장도 음력 동짓달 중순에서 섣달 중순 사이에 담근다. 신맛 제거를 위한 ‘저온 발효’다.

계절을 달리 해 만드는 장맛의 우위는 다른 지역 산물과의 비교실험으로도 입증됐다. 순창고추장에는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제일 많고 쓴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적게 들어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메주를 띄우는 시기가 여름철이어서 곰팡이가 잘 분해되니, 단맛을 내는 효소가 그만큼 활발하게 용해된다는 이야기다. 대신 고추장을 담그는 시기가 추운 겨울이어서 당화(糖化) 속도가 느리고 유산균의 번식이 더뎌 신맛을 내지 않고 감칠맛이 생긴다.

순창은 고추장의 맛을 좌우하는 효모균이 자라기에도 최적의 기후이다. 일년 중 안개일수가 70~75일로 50일이 채 안 되는 전국 평균에 비해 월등히 많다. 15~20℃에 달하는 충분한 일교차도 확보하고 있다. 풍부한 일조량과 뚜렷한 일교차, 넘치는 습기는 온난다습한 곳을 좋아하는 효모균들의 낙원이다. 요컨대 최고가 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셈이다. 순창고추장은 이렇게 햇볕과 물, 바람이 만든다. 어쩌면 인간은 조력자에 불과하다. 하긴 그렇지 않은 일을 헤아려보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우습고, 또 답답하다.

곰팡이에게 천국이라면 사람에겐 지옥이다. 뭐든 잘 썩는다는 의미니까. 햇볕과 물, 바람의 포만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잘 부패하고 잘 녹스니 순창에서는 음식물과 가옥 관리에 특히 신경이 쓰인다.

발효란 미생물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효소를 이용해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발효와 부패는 비슷한 과정으로 진행되는 현상이지만 가치는 전혀 딴판이다. 분해 결과 인간에게 유용하면 발효요, 유해하면 부패다. 만일사 대웅전 뒤편으로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법당의 등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은 손발도 없는 게 잘만 돌아다닌다. 바람에 실린 온기와 습기 역시 몸이 없는 것들이다. 이름을 기릴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바람은 자유롭게 휘돌며 세상을 깨우고 망친다.

순창=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23호/ 5월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