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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함안 장춘사의 불두화

 

함안 장춘사의 불두화



장춘(長春)이라 해서 봄이 긴 줄 알았다. 애당초 착각이었다. 함안. 더위를 가장 먼저 빨아들이는 남도 자락이다. 봄이 길 까닭이 없다. 마침 절을 찾은 날은 5월 끝물이었는데 날씨는 7월까지 앞질러 간 느낌이다. 숲은 이미 한여름이었고 절은 숲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장춘사 입구까지 1km에 이르는 숲길은 아늑했지만 호감(好感)은 짤막했다. 경내에 들어서자 뙤약볕이 활개를 쳤다. 절의 숲은 온몸에 들척이는 땀처럼 지상과 허공에 엉겨 붙었다. 숲은 산신각을 거의 다 먹어치웠고 ‘잔해’만이 드문드문 비쳤다. 자꾸 처지고 겨웠다.





세월에 집착 않으면 괴로울 일 없을 것을




장춘사는 산사의 통상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의 뇌리에서 꺼내 그대로 땅 위에 발라놓은 것 같다. 고요하고 무료하다. 주지 법연스님은 장춘사를 두고 “그냥 그런 절”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14년간 홀로 절을 지켜왔다. 짧지 않는 시간이지만 변화한 것도 변화시킨 것도 없다. 절 안의 건물들은 주지로 부임해 들어오던 그때 그대로다. 처음부터 워낙 깔끔했다. 요사채의 기와만 새로 얹은 게 불사의 전부다. 무릉산 아래로 지는 노을이 그나마 볼거리다. 쉬라면 좋아도 살라면 애매한 절이다. 도시인이라면 사흘도 못 버틸 공간에서 스님은 “그냥 살았다”고 했다. 당신의 짧고 낮은 말투에서 문득 느꼈다. 장춘은 사시장춘(四時長春)으로 읽어야 했다.

불두화(佛頭花)는 부처님오신날 전후에 핀다. 부처님의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장춘사 대웅전에도 한 그루가 자랐다. 절 안엔 불두화 말고도 붓꽃과 작약이 곳곳에 피어 여름의 권태를 씻는다. 불두화는 큼지막한 게 주먹밥처럼 생겼다. 가까이서 보면 엄지 손톱만한 꽃잎들이 무더기를 이룬 겹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꽃의 빛깔이 변한다. 푸르게 태어나 하얗게 머물다 노랗게 저문다. 수술과 암술이 퇴화돼 사라진 무성화(無性花)다. 벌이 날아들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임이다. 결국 사람이 나서서 출산을 도와야 한다.

불두화가 아름다움과 자손을 지키려면 꺾꽂이가 필수적이다. 꺾꽂이는 가지나 잎을 잘라낸 후 다시 심어서 인공적으로 식물을 얻어내는 재배 방식이다. 모든 세포가 자신을 재현할 수 있는 식물의 본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온몸이 뿌리인 셈이다. 발 없는 것들이 살아가는 본연의 방식이다. 발을 가진 것들은 발 없는 것들의 삶을 가여워 하고 입을 가진 것들은 입이 없는 것들의 삶을 보며 안도한다. 발로 차고 입으로 물어뜯으며 생존의 우위를 만끽한다.

장춘이란 작명은 어쩌면 평화를 향한 염원이었겠다. 장춘사는 신라 흥덕왕 7년(832)에 창건됐다. 남해안에 창궐하던 왜구를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신통력으로 물리치자, 임금이 보답으로 내린 절이다. 다만 스님의 부도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菩光塔碑)’에 따르면 흥덕왕을 세웠다는 시기에 당신은 당나라 유학 중이었다(821~845). 전설의 진실성이 으깨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인근의 창원 성주사와 진해 성흥사의 창건설화가 장춘사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무염이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왜구(倭寇).

유럽에 바이킹이 있었다면 아시아엔 왜구가 있었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해적들은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대륙의 해안을 돌며 갖은 약탈을 일삼았다. 2세기경 발간된 <한서지리지>에도 등장한다. 바이킹은 나름 ‘문화’가 있었다. 왜구는 정치세력화의 측면에선 바이킹에 뒤졌지만 약탈의 시간과 강도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왜구에 의한 한민족의 수난사는 삼국시대부터다.

특히 신라가 유난히 많이 당했다. 바닷길이 가장 가깝고 중앙집권체제가 약해 국가의 통합안보 시스템이 낙후됐던 탓이다. 13세기 고려 말엔 연 평균 12회의 왜구 침략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당한 셈이다. 우왕 재위 14년 동안엔 무려 380번을 당했다. 그들은 남해안을 걸레로 만들고 평안도까지 도륙했다. 왜구는 일본의 정규군이 아닌 단순한 강도단이었다. 근사한 명분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생계와 재미를 위해 빼앗고 죽이는 게 전쟁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민중들에게 장춘에 대한 희망은 뼈저리게 당연한 것이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다.

여름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엔 눈 내린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한가롭게 지낸다면 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선 수행의 고전인 <무문관(無門關)>을 남긴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의 글이다.

주변 환경에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훈계다.


세상은 바뀌고 왜구는 사라졌다. 그래도 ‘장춘’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총칼에 대한 공포는 자본에 대한 공포로 치환됐다. 폭력의 신은 물리적 강도를 완화하는 대신 정당성의 강화를 택했다. 결국 사람을 합법적으로 오랫동안 괴롭힐 수 있게 됐다. 여하튼 자본은 총칼에 비해 짐짓 점잖은 방식으로 상처를 준다. 대놓고 복수를 하거나 까놓고 하소연을 하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자본은 무섭고 장춘은 더 멀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다. 여름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엔 눈 내린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한가롭게 지낸다면 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선 수행의 고전인 <무문관(無門關)>을 남긴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의 글이다. 주변 환경에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훈계다.

스님의 고향은 중국 절강성 항주다. 아열대에 속하는 항주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비도 많고 볕도 많다. 무더운 여름과 쾌적한 가을 덕분에 곡식이 잘 자란다. 먹을 것이 풍족해 예로부터 상업도시로 번창했다. 서시(西施)가 태어난 곳이고 예로부터 미인들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설악산이 우스워지는 천혜의 경관 황산(黃山)도 들쑥날쑥한 날씨를 먹고 자란 것 같다. 지천으로 널린 ‘먹거리’와 ‘볼거리’와 ‘놀거리’는 항주의 선 굵은 기후에 빚지고 있다.

  <사진> 함안 무릉산에 위치한 장춘사 전경.

적도나 양극에서 문명이 흥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춘하추동의 구분이 분명한 위도를 점유하고 있다. 더위와 추위의 반복이 사람들을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었다는 생각. 날씨로부터의 해방은 인류사의 무시할 수 없는 단면이다. 부채에서 에어컨까지 모닥불에서 보일러까지 자연의 순리를 배제하며 인간은 그들만의 질서를 구축했다. 적어도 에어컨을 사고 보일러를 마구 돌릴 수 있는 이들에게, 장춘은 실현됐다.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뜨겁고 무례한 배설물에서 보듯, 자연을 약탈한 공간의 크기가 곧 문명의 수준이다. 내가 시원하려면 남이 쪄죽어야 하는 메커니즘이다. <벽암록> 43칙은 ‘역류’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떻게 피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동산양개 선사는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가 되라’고 답했다.

선지식들은 세상의 욕망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잘나고 멋진 것을 혐오하고 못나고 추한 것에 귀 기울였다. 그것만이 궁극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잘나고 멋진 것을 구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으려면 반드시 남과 싸워야 하기 마련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냥’ 산다는 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장춘엔 희생이 필요하다.

함안=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30호/ 5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