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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상주 남장사의 이백

 

상주 남장사의 이백

  남장사 극락보전 내벽에 그려진 이백기경상천도(李白騎鯨上天圖).




사찰서 노니는 이백의 모습서 피안을 그리다



희대의 풍운아를 절에서,

그것도 우리나라 절에서 만난다는 건 희귀한 경험이다.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엔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그림이 걸려 있다.

…발밑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술병이 놓였다.

고래는 고래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깝다.

필치가 자못 해학적이다.


두보(杜甫, 712~770)가 눈물의 시인이었다면 이백(李白, 701~762)은 냉소의 시인이었다. 말을 잘 다루기로 당대 으뜸이었던 두 사람은 각각 시성(詩聖)과 시선(詩仙)으로 달리 상찬된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시대에 대한 입장과 해법은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이 연달아 일어나 당나라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는 누란의 상황이었다. 두보가 인간으로의 복귀를 부르짖은 반면 이백은 인간으로부터의 초월을 꿈꿨다.

두보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할 때 이백은 달빛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두보는 세상을 사랑했지만 이백은 세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방탕하고 불손했다.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젊어서는 청운의 꿈이 있었다. 독서와 검술을 즐겼고 시 속에 출사(出社)에의 의지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현종과 양귀비의 눈에 들어 궁궐에서 잠시 일했지만 주변의 험담으로 금방 쫓겨났다. 그의 말들은 세상을 꾸미는 데는 특출했지만 세상을 바꾸기엔 젬병이었다.

이백이 지은 고풍오십구수(古風五十九首)의 앞머리다. ‘태백산은 어찌나 푸르고 푸른지(太白何蒼蒼) 별들은 숲 위에 빽빽하게 늘어섰다(星辰森上列). 하늘과의 거리는 삼백리(去天三百里), 아득하도다 속세와의 절연이여(莫爾與世絶). 산 속에 있는 검은머리 노인(中有綠髮翁), 구름을 헤치고 소나무 그늘에 누워 있다(披雲臥松雪). 웃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不笑亦不語) ….’ 이백의 시에 나타난 시적 자아는 ‘너희의 위선과 부패가 역겨워 홀로 떨어져 지낸다’는 긍지로 똘똘 뭉쳤다. 입신(立身)은 꺾였고 그는 자연을 재기의 공간으로 택했다. 술을 벗했고 도교를 읽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로부터 멀어질수록 자폐와 치기는 눈이 부셨다. 그에게 인간은 재난과 같았다.

‘주태백.’ 술에 취해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전설은 구태여 사실이 아니어도 강력한 울림을 지녔다. 후대인들은 이백의 삶에서 시인으로서의 재주보다 신선으로서의 풍모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법이니까. 마음대로 다니고 마음 놓고 즐긴 이백은 가정을 떠멘 죄로 이런저런 책임에 시달려야 하는 중년 남성들의 로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몰락의 대가였다는 사실은 쉽사리 망각한다.

상주 남장사(南長寺)는 경상북도 팔경(八景) 가운데 하나다. 서기 832년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가 창건해 장백사(長柏寺)라 이름 했다. 1186년 각원화상(覺圓和尙)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이름도 남장사로 고쳤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쌍계사 진감국사비에 따르면 ‘당(唐)나라에서 돌아온 국사가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서 선(禪)을 가르치니 배우는 이가 구름처럼 모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상주의 명찰(名刹)은 모두 진감국사의 작품이다.

희대의 풍운아를 절에서, 그것도 우리나라 절에서 만난다는 건 희귀한 경험이다.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엔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그림이 걸려 있다. 전각의 왼쪽 내벽, 천장과 맞닿는 자리다. 제목은 이백기경상천(李白騎鯨上天). 수묵담채화 형식이다. 가로는 1미터 남짓, 세로는 1미터에 못 미친다. 이백은 기마자세로 고래의 등 위에 서서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목적지를 응시하고 있다. 남루한 행색에 초췌한 얼굴이다. 발밑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술병이 놓였다. 고래는 고래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깝다. 필치가 자못 해학적이다. 고우영 만화를 보는 느낌이다. 남장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을 그린 사람과 시간은 오리무중이다.

극락보전 오른쪽 내벽엔 적송자(赤松子)를 그린 회화가 걸려 있다. 적송자는 중국 선사시대 신농씨(神農氏)를 도와 비를 다스렸다는 신선이다. 각종 음식을 먹는 방법과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방법을 일러주며 성세를 같이 도모했다.

적송자가 바위에 무언가를 쓰고 있으며 동자 하나가 벼루를 받치고 옆에서 보좌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남장사의 적송자는 전형적인 중국 문신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본래 적송자는 거지의 몰골이었다. 짚으로 된 거적을 걸치고 가죽치마를 둘러 입었다. 머리칼은 봉두난발이었고, 다리는 맨살을 드러냈다. 손톱은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을 닮았고 온몸은 누런 털투성이였다. 손에는 버들가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했다. 실성한 듯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다니기도 했다. 혹여 마주치면 민망할 광인이었지만 그를 그리워한 후대인들은 많았다.

한고조 유방을 보위하며 중국을 통일한 장량(張良)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를 좇아 놀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속세에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거나 이룰 힘이 없을 때마다 적송자는 흠모의 대상이 됐다. 이외에도 극락보전 내부는 여러 폭의 신선도로 가득하다. 잔뜩 주름지고 구부러진 도인들은 한가롭게 등을 긁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잡담을 나눈다. 그들의 늙음과 무능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사진> 남장사 영산전으로 올라가는 길.

극락보전 외벽에도 중국 고사와 관련된 그림이 새겨졌다. ‘하우도강도(夏禹渡江圖).’ 하나라 우왕 일행이 물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강을 건너는 모습으로 보인다. 우왕은 중국 하나라를 개국한 전설 속의 임금이다. 순(舜) 임금에게서 양위받기 전부터 그는 치수의 대가였다. 강바닥에 쌓인 흙을 제거하는 공사를 직접 감독하면서 13년 만에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 치수는 정치의 기본이었고 백성의 안락을 향한 그의 저돌성과 성실성은 두고두고 모범으로 회자됐다.

옛 명현(名賢)들을 소재로 삼은 고사인물화는 상고주의(尙古主義)의 산물이다. 화폭에는 현왕(賢王)이나 충신(忠臣)이 담겼고 지조를 지킨 은자가 주인공으로 나서기도 한다. 식자들은 그림을 그리고 보면서 처신의 지표로 삼았다. 주지하다시피 유자들은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삼았다. 그들의 허다한 사상과 논설은 궁극적으로 요순의 성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요지로 귀결된다. 이 시대의 단적인 특징은 백성들이 임금의 이름을 몰랐다는 것이다.

전쟁이 없었고 공권력이 불필요했다. 사람 셋이 만나도 싸우지 않는 절대적 안정의 시대였다. 내 몫을 빼앗아 취해야 할 만큼 빈한하지도 야박하지도 않았다. 다시는 돌아올 수도 어쩌면 존재한 적이 없었던 세상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면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체제다.

‘내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問余何意棲碧山)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한가롭다(笑而不答心自閒).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가니(桃花流水然去) 별천지요 인간세상이 아니라네(別有天地非人間).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사찰에 그려진 비불교적인 회화들은 유불선(儒彿仙) 삼교가 회통하는 한국의 사상적 전통을 시사한다. 그래서 절에 있어도 그다지 이물스럽지 않다. 사람이 돌아가야 할 적막을 미리 체험하게 해주는 절에서 되돌릴 수 없는 평화를 생각한다.

상주=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34호/ 6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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