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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논산 관촉사의 미륵

 

논산 관촉사의 미륵


미륵은 위험한 부처님이다. 미륵을 참칭하는 자들은 백이면 백 사기꾼이었다. 56억 7000만년 만에 내려온다는 신화는, 약물을 쓰지 않고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지독하게 인색한 온정에 많은 민중이 울었다. 울면서 밟히고 밟히면서 울다가 또 속고 또 무너졌다. 재림의 주기만큼이나 재림의 강도 역시 어처구니 없었다. 미륵불의 세상은 고통이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낙원이었다. 주민들의 수명은 8만8000세였고 생각만 하면 모든 것이 실제로 이뤄지는 곳이었다. 누구도 외면하기 어려운 꿈이다. 꿈이 크면 병도 크고 병이 크면 꿈도 크다. 지독하게 아프면 헛것이 보인다. 아프면 아플수록 헛것은 살찐다. 미륵은 절망의 해법으로 자주 애용됐다. 몸의 헛것과 마음의 헛것은 서로 손을 잡고 이성(理性)과 살림을 파먹었다.

  

  

절망의 끝에서 ‘민중의 부처님’을 좇아가다

   

   

미륵불상은 길가에 뒹구는 돌덩이에서 출발했다. 백성들은 사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골라 마을 한가운데 가져다두고 복을 빌었다. 신앙의 유통은 역전됐다. 민초들의 병든 마음에 자생적으로 자라난 꿈을 사찰이 주워 담아 받드는 식이었다.

미륵은 예수 이전 한국인들의 오랜 메시아였다. 백성들의 미륵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폭력을 싫어하며 절대적 권위를 통해 죽음과 폭력을 해소하려는 본능에 의한 발명이었다. 최악의 빈곤과 소외만 막아달라는 몸부림이었다.

백제와 신라의 왕권은 순조로운 지배를 위해 미륵신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임금은 곧 미륵이라고 우겼다. 임금은 미륵처럼 차려입긴 했지만 미륵처럼 살지 않았다. 임금의 미륵은 죽음과 폭력을 강요했다. 임금과 백성은 같은 미륵을 두고 다른 꿈을 빌었다. 애초에 길이 갈렸고 그들은 고금에 걸쳐 반목할 수밖에 없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이비 미륵의 변덕에 시달릴수록 백성들의 꿈은 더 요란하고 얼토당토않게 커졌다. 바위에 눈 코 입을 그리고, 손발을 돋울수록 꿈은 구체화되고 치졸해졌다. 미륵의 형상이 뚜렷해질수록 백성의 미륵은 임금의 미륵과 닮아갔다. 무지막지한 대불(大佛)을 모시기에 이르렀고 의식은 화려하고 복잡해졌다. 밥 한 술 마음 놓고 뜨고 싶다는 욕심 역시 밥상과 반찬을 가리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논산에 관한 기억은 짧고 가파르다. 연무대에서 훈련병 신분으로 뭉개던 두 달 외에는 밟아 본 적 없는 땅이다. 그 때도 여름이었다. 복종과 치욕, 불만과 인내가 한 모밭에 뒤엉킨 날들이다. 오래 군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신참들에게 상관을 아비로 막사를 집으로 삼으라고 권장했다. 하지만 갓 들어온 사내들이 바라던 미륵은 누가 뭐래도 제대였다. 관촉사로 가는 길은 뜨거웠다. 장마는 시작된 지 사흘 만에 한풀 꺾였다. 젖어있던 열기들은 습기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 제218호다. 주로 별명인 은진(恩津)미륵으로 불린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조성됐으니 1000년을 훌쩍 넘긴 나이다. 높이 18.12미터 둘레 11미터, 귀의 길이는 3.33미터다. 어떻게 돌을 옮겼을 지가 의문이다.

머리가 반, 몸통이 반인 형국이다. 지나치게 큰 얼굴이 사뭇 해학적이다. 하지만 이만큼 이목구비가 선명한 미륵불상을 본 적도 없다. 부리부리한 눈과 넙적한 코, 길게 늘어진 귀와 두툼한 입술은 세월의 풍화를 비웃는다. 오른손이 불상의 몸 쪽으로 가려져 수인(手印)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인지 하품하생인(下品下生印)인지 분명치 않다. 중지를 구렸다면 전자요 약지를 구부렸다면 후자다. 수인은 부처님의 권능과 깨달음의 내용을 손가락으로 표현한 상징이다. 제도해야 할 중생의 근기(品)와 처지(生)에 따라 부처님은 다르게 설법했으며, 수인도 품과 생을 상중하로 가른 뒤 9가지로 나눈다. 으레 미륵의 환상을 품는 계층들의 신세를 고려하면 은진미륵의 수인은 하품하생인으로 봐야 옳다.

 

성물(聖物)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적 평화를 고민하는 몸짓의 대상이라면 충분히 정당하다.

항상 주객이 전도되면 문제다.

신성이든 제도든 자본이든

사람 아닌 것이 사람을 지배할 때,

세상은 정신을 놓는다.

자꾸 남에게서 메시아를 구할 때,

세상은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른다.

미륵을 이용하는 모리배들은 대개 이것을 노린다.



은진(恩津)은 예전 논산에 있던 읍(邑)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미륵이 은진이란 별명을 얻게 된 전설은 애먼 지역과 엮여 있다. 어느 날 아낙 둘이 고사리를 캐다가 갓난아기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아이는 없고 거대한 바위만 솟아오르고 있었다. 괴이한 현상에 놀란 여인들은 관가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소문은 임금에게까지 흘러들었다. 조정은 하늘의 상서로운 계시로 해독했고 왕은 그 자리에 불상을 조성하라 명했다.

불사의 총책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혜명대사였다. 스님은 바위를 하반신으로 삼고 다른 지역의 바위로 머리와 몸통을 조각해 서로 이어 붙였다. 미간에 박힌 수정이 발하는 빛은 중국에서도 볼 수 있었단다. 절의 이름은 그래서 관촉(灌燭)이 됐다. 은진미륵이 완성된 직후 북쪽 오랑캐가 쳐내려왔다. 시대로 보아 거란이거나 여진이다. 대군은 압록강에서 길이 막혔다. 도강의 방법을 고민하던 와중 한 스님이 태연하게 강을 건너는 장면을 목격했다. 강의 깊이를 얕잡아 본 오랑캐들은 곧추 강에 뛰어들다가 몰살당했다. 스님은 물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손쉬운 승전을, 미륵을 세운 공덕이 외침에 개입한 결과라고 믿었다. 이때부터 은진미륵이 됐다. 불상의 조성과 전쟁의 승리는 상식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나 세상은 별개인 사건에 인과관계를 억지로 삽입했다. 우연을 용납하지 않았다. 모든 게 우연이라면 오늘은 위태롭고 내일은 허망할 테니까. 미륵이 국가적 재난을 막아준 것처럼 자신의 삶으로 엄습해오는 악들을 차단해 주길 원했다. 행운과 불운을 그냥 넘기지 않았고 반드시 이유를 물었다. 그런 식으로 복을 감사하고 화를 인정했다. 민중은 그렇게 왜곡의 힘으로 버텼다.

서울 조계사는 2006년 11월 대웅전에 대형 삼존불을 봉안했다. 법당의 격에 맞지 않게 왜소한 목조불상을 대체한 것이다. 새로 모신 부처님은 우람하고 화려했지만 절에 오래 다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불만을 표시했다. 덕분에 꼬부랑 할머니들이 기자회견을 여는 이색적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부처님을 해하지 말라”고 했다. 몇몇 분들은, 울었다.

구조주의자들은 역사의 발전을 부정한다. 세계 각국의 문화는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기에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나무토막을 신으로 떠받드는 미개인이나 예수 믿고 천국 가자는 현대인이나, 원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삶이다. 개인의 영달을 바라는 종교행위는 민망하지만 최소한 민폐가 되진 않는다.

종교적 예경은 불상이나 십자가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성물(聖物)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적 평화를 고민하는 몸짓의 대상이라면 충분히 정당하다. 항상 주객이 전도되면 문제다. 신성이든 제도든 자본이든 사람 아닌 것이 사람을 지배할 때, 세상은 정신을 놓는다. 자꾸 남에게서 메시아를 구할 때, 세상은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른다. 미륵을 이용하는 모리배들은 대개 이것을 노린다.

논산=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38호/ 6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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