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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남양주 묘적사의 연못

 

남양주 묘적사의 연못

 

 묘적사 경내에 있는 연못. 
         
        

밝음을 잉태해내는 더러움 


                             
무엇이 이보다 아름다우랴 
      


처염상정(處染常淨)은 오래된 가치다. 진흙탕에서만 꽃을 피우는 연(蓮)을 기리는 말이다. 오탁악세(汚濁惡世)에서도 선연한 청정함을 유지하는 연은 예로부터 보살의 꽃, 군자의 꽃이라 불렸다.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났다는 이제염오(離諸染汚), 꽃잎에 일절 오물이 묻지 않는다는 불여악구(不與惡俱) …. 순일한 윤리의 상징엔 수많은 수사가 붙었다. 낡고 썩은 세상에서 혼자 잘 살고 있는 연꽃을 보면 어떤 열등감을 느낀다.

세상과 결탁하지 않고서도 속세의 영예를 독차지할 수 있는 기술 때문이다. 그의 생태란 것도 여느 생명과 마찬가지로 고단하고 치졸한 밥벌이일진대, 삶의 비루한 이면을 좀체 들키지 않는다. 그걸 지적하는 사람도 드물다. 트집을 잡기엔 겉모양이 너무 아름답다. 그래도 눈에 속기 시작하면 눈이 멀어도 모른다. 세상과 명확하게 선을 긋고 사는 인생이 과연 닮아야 할 귀감인지 좀더 생각해볼 일이다. 진흙은 연꽃을 연꽃답게 해주는 충실한 조연이다. 차라리 온갖 잡것들을 부둥켜안고 사는 연못이 더 정겹다. 그는 살면서 저지른 죄들을 아무나 볼 수 있도록 방치한다. 그의 악취는 정직하다.

연이 자라는 물은 어둡고 탁하다. 연은 제 몸으로 물들을 물들인다. 무채색으로 빨아들인 자연은 고된 실체의 무게를 벗고 환영으로 통통 떠다닌다. 연못을 소재로 한 전설은 대개 위험이나 흉조를 겨냥하고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불운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연못과 관련된 전설은 상당한 숫자가 용의 좌절을 그리고 있다. 심연일수록 괴물의 모습은 크고 흉측하게 상상됐다. 국가에 간택되지 못한 영웅은 역적이며 그의 능력은 무슨 일을 벌여도 모반이었다.

연못의 전설은 체제로부터 낙인이 찍히면 항우장사도 견딜 수 없는 불행에 대한 겁먹은 고백이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은 황부자의 패망과 연결돼 있다. 단순한 줄거리다. 소문난 구두쇠였던 그에게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그는 스님의 발우에 밥 대신 똥을 푸지게 담아주었다. 며느리가 나서 시아버지 몰래 노승을 공양했다.

쌀을 얻은 노승은 다음과 같은 말로 보답했다. ‘이 집안의 운이 다해 곧 큰 변고가 있을 터이니 살려거든 나를 따라 오시오.’ 며느리는 아들을 업은 채 스님을 따랐다. 그러나 뒤에서 뇌성벽력이 쳐도 절대 돌아보지 말라는 충고를 어기는 바람에 걷다가 돌이 되어버렸다. 황부자는 이무기가 되어 자신의 저택이 무너진 자리에 생긴 연못에서 살았다. 황지연못은 악(惡)의 쓸쓸한 말로를 가르치고 있다.

연못은 풍수학의 산물이다. 땅의 기를 보완하고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역할을 했다. 전문용어로 비보(裨補) 풍수라 한다. 불상을 앉히고 불탑을 세우는 일도 비단 종교의 영역에 국한된 행위가 아니었다. 사람이 아플 때 침을 꽂거나 뜸을 놓는 것처럼 불상과 불탑도 땅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졌다. 연못이나 장승도 예외가 아니었다. 땅의 기력이 흥하면 그 은덕이 인간에게까지 미칠 것이라 믿었다. 기도 영험의 극대화를 위해 사찰 경내에 연못을 파는 일도 엇비슷한 맥락이다.

묘적사 연못의 나이는 40세 안팎이다. 1971년 대웅전과 요사가 중건되고 1976년 관음전이 새로 서는데 연못의 조성은 이 무렵으로 짐작된다. 해가 갈수록 더러워져 올봄에 깔끔하게 손을 봤다. 연꽃은 볼 수 없고 군데군데 연잎이 떠다닐 뿐이다. 연꽃 대신 돌부처님이 가운데 정좌했다. 연못에 비친 세상은 어둡지만 은은했다. 색이 선명한 연꽃이 피었다면 오히려 상했을 풍경이다.


연이 물 위에서 꽃을 피웠다면

누구나 그것이 연꽃임을 분명하게 알아챈다.

그리고 쉽게 연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문 선사는 뜻밖으로 연잎이라고 명명하며 통념을 깼다.

물 안에 잠겼을 때나 물 밖으로 나왔을 때나

연꽃은 똑같이 연꽃이다.



묘적사는 신라 문무왕 시절 창건됐다고 전한다. 아쉽게도 아무런 기록이나 유물이 뒷받침되지 않은 풍문일 뿐이다. 다만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에 양주목(楊洲目) 불우조(佛宇條)조가 세조 재위 시의 묘적사를 언급하고 있다. 구전되는 얘기로는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설치됐던 곳이다.

왕실을 보호하는 경호요원 양성소였다는 설인데 장정들을 승려로 위장해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훈련시켰던 공간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을 치른 뒤에는 승려들이 무과(武科) 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으로 쓰였다. 절 앞 동쪽 공터에서 화살촉이 자주 발굴됐다. 이후 경내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설 정도로 폐사됐다가 1895년 규오(圭旿)스님이 산신각을 중수하며 절을 일으켰다. 대웅전 앞 팔각칠층석탑은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1호다.

<사진> 묘적사 산신각으로 올라가는 길.

<벽암록(碧巖錄)>의 21칙은 연꽃에 관한 선문답이다. 지문연화(智門蓮花). 지문광조(智門光祚)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연꽃이 물 속에서 아직 피지 않았을 때는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연꽃이다.” “그렇다면 물 밖으로 튀어나와 꽃이 피었을 때는 무엇입니까?” “연잎이다.” 연꽃은 불성(佛性)의 비유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번뇌와 미혹에 가려 불성의 유무를 확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물 속에 숨어 있는 연꽃과 같이 불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어려운 설명이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연이 물 위에서 꽃을 피웠다면 누구나 그것이 연꽃임을 분명하게 알아챈다. 그리고 쉽게 연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문 선사는 뜻밖으로 연잎이라고 명명하며 통념을 깼다. 물 안에 잠겼을 때나 물 밖으로 나왔을 때나 연꽃은 똑같이 연꽃이다. 더불어 연잎이 없는 연꽃은 존재할 수 없다. 연꽃과 연잎은 한 몸이다. 결국 선사의 ‘딴청’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분별하고 편견을 갖는 중생심에 내리는 경책이다. 언어로 표현하는 진실은 언제나 빗나간다.

본칙(本則)의 핵심을 담은 수시(垂示)는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내세우는 일은 비단 위에 꽃을 펴놓는 것과 같다. 굴레를 벗어던지고 짐을 내려놓으면 그야말로 호시절이다. 만약 격 밖의 한 마디를 터득했다면 하나를 드러내도 셋을 알 것이니 그렇지 못하다면 옛 사람의 공안(公案)에 따라 그 언행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조사선의 테마는 즉불(卽佛)이다. 선사들은 ‘중생심이 불심이고 불심이 중생심’임을 언제 어디서나 강조했다. 즐겁고 괴롭고 달갑고 역겨운 마음의 갖은 작용들이 불성의 발현이요 번뇌와 엮이지 않은 깨달음은 위선이라고 타일렀다. 낮고 헐한 마음도 마음이요 높고 성한 마음도 마음이다. 자기를 바로 보면 부처가 보인다. 끊임없이 욕심내고 분노하고 고민하던 불안한 마음의 길이 사실은 부처가 걸었던 길과 다르지 않았음을. 최소한 그때 그곳에서만큼은 그것이 최선의 길이었음을 말이다. 불이(不異)요 불이(不二)다. 연꽃과 연잎의 관계에 깃든 불이는 연꽃과 진흙의 관계로도 확장된다.

석두희천 선사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밝음 가운데 어둠이 있거든 밝음으로써 만나려 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거든 어둠으로써 보려 하지 말라. 밝음과 어둠이 상대됨은 마치 앞뒤의 발걸음 같은 것(當明中有暗 勿以明相遇 當暗中有明 勿以暗相覩 明暗各相對 譬如前後步).’ 묘적(妙寂). 어둠도 빛이다. 묘적사의 연못은 검어서 푸근하고 작아서 놀라웠다.

남양주=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40호/ 7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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