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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서귀포 봉림사의 하논

 

서귀포 봉림사의 하논

 

 <사진> 화산 분화구에 생성된 하논. 오른쪽 아래 사진은 서귀포 봉림사 내부.

‘하논’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크다’의 고어인 ‘하다’의 하와 논이 들붙은 합성어였다. 어쨌든 멋진 이름이었고 그래서 찾아갔다.

하논은 화산 분화구 위에 생성된 논이다.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동쪽 방면 4km 지점에 있다. 서귀포시 호근동과 서홍동의 접경이다.

봉림사 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오르면 하논의 전경이 차츰 드러난다. 동서로 약 1.8km, 남북으로 약 1.3km 벌어진 타원형의 평지다.

주민들은 여기서 500년 전부터 쌀을 지어 먹었다. 밭농사가 대부분인 제주도에서는 흔치 않은 복이다.





자연에 묻힌 절터서 섬사람의 불심을 곱씹다




분화구 바닥이 내뿜는 용천수의 양은 하루 1000리터에서 5000리터에 달한다. 2004년 2월 국제 심포지엄이 열려 나라 안팎 지질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도쿄도립대 후쿠자와 히토시 교수는 “이 분화구의 습지퇴적물을 연구하면 3만년에서 6000년 전 사이에 동아시아에 언제 비가 많이 왔는지, 무슨 식물이 살았는지, 지진이나 화산이 있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고 말했고, 제주대 해양과학부 윤석훈 교수는 “5만~7만6000년 이전에 생성된 것으로 그 당시의 식생과 기후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연습지인 하논은 수만년 전 창궐했던 활화산이 남기고 간 선물이다. 일만 잔뜩 저지르고 뻔뻔하게 내빼진 않았던 셈이다. 때마침 비가 내려 풍경은 짙고 가쁜 숨을 푹푹 몰아쉬었다. 비에 젖은 하논은 미륵불이 언젠가 앉을 좌복 같았다.

하논은 제주도 전역에 걸쳐 360개가 넘는 ‘오름’ 가운데 하나다. 오름이란 화산섬 제주에 흩어져 있는 기생(寄生) 화산구를 말한다. 바다 밑에 잠들어 있던 땅이 크게 터지면서 수많은 오름이 거품처럼 피어올랐다. 제주도는 몸 전체가 화산이다. 화산은 100년 정도 살아서 겪을 만한 재난이 아니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이 가진 가장 큰 섬이다. 본토와는 판이한 체질과 문물로 채워진 섬의 산하와 역사는 공간과 시간의 희귀성 덕분이다.

제주도의 주요 지층은 현무암. 육지에선 발아래 차이는 게 화강암이다. 현무암은 화산의 잔해다. 표면이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이다. 섬의 땅들은 물을 한 줌도 머금지 못한다. 땅으로부터 거부당한 물은 흐르고 흘러 섬의 가장자리에서 일제히 솟구친다. 민가가 해안가에만 밀집한 이유다. 하논이 이적(異蹟)으로 대접받는 이유도 된다.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주변을 비웃으며 하논은 24만㎡에 이르는 기름진 몸집을 자랑한다. 하논이 식상할 때쯤이면 화구호(火口湖)와 용암동굴이 나서서 이국의 멋을 선사한다. 볼거리가 많은 지세와 사시사철 따뜻한 날씨를 업고 섬은 쉽사리 관광자원으로 발전했다.

고등학교 시절, 제주도가 고향이었던 한문교사는 “제주도는 대한민국으로부터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고 자주 농담을 했다. 입버릇처럼 꺼내는 독립의 근거는 언어의 현격한 차이였다. 다음은 제주도 토박이가 나누는 대화의 한 토막이다. 인터넷에 소개됐다.

 ‘A : 물지가 언제꽝? 바당에 곧지 가게마씸.(물때가 언제 입니까? 바다에 같이 갑시다.) B : 맸칠 이서사 헐거우다, 요샌 바당 쌔여부난.(며칠 있어야 할 겁니다. 요즘은 바다의 파도가 높아서.) A : 아촘, 정지에 풋죽헌거 이신디 맨도롱 헌때 허꼼 먹엉 갑써.(아참, 부엌에 팥죽 끊인 것이 있는데 따뜻할 때 조금 드시고 가십시오.) B : 아니우다, 이땅 아이들오만 줍써, 난 집이서 먹언 마씸.(아닙니다, 있다가 아이들 오면 주십시오. 나는 집에서 먹었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외국어다. 물론 이것은 ‘설정’에 가깝다. 교통과 통신이 자유로운 오늘날 도민들은 표준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사투리는 필요할 때만 쓴다. 주류가 아니다. 옛 스승의 푸념은 주는 것 없이 빼앗아가기만 하는 본토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다. 탐라총관부가 그랬고 이재수의 난이 그랬고 4.3이 그랬다. 하논은 멋지기 전에 낯선 낱말이다. 중앙의 권력은 최남단의 영토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뤘다. 신비로 읽었을 때는 여행을 왔고, 이질(異質)로 읽었을 때는 군대를 보냈다.

봉림사는 본래 용주사(龍珠寺)였다. 1929년 최혜봉스님이 창건한 용주사는 ‘4.3’으로 불타 없어졌다. 스님은 1945년 12월 개최된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에 참여했었다. 전소될 당시 용주사엔 18평 남짓의 초가집 법당과 요사가 있었다. 불상과 탱화는 용케 챙겨 여염집에 숨겨놓았다. 1968년 대웅전을 다시 지었고 황림사란 이름으로 재건됐다. 1983년 봉림사로 사명이 거듭 바뀌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94년에 완공됐다.

전란 통을 피해 등에 지고 다녔다는 탱화 중 일부는 소각됐다. 남은 것 역시 법정사에 모셨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오리무중이다. 불상은 훼손이 심해 1970년대 새로 삼존불을 조성하면서 교체됐다. 오늘날 사찰에 남아있는 옛 유물은 없다. 대신 과거의 상처로 읽힐 만한 것도 없었다. 봉림사는 조경(造景)이 완벽했다. 갈라지고 어긋난 역사를 꽃과 나무로 바로잡았다.

<고려대장경> 제30권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密多羅所說法住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탐몰라주 발타라 존자는 부처님 열반 후 중생들이 삼보를 호지하는 데

… 탐몰라주는 탐라국을 가리킨다.

탐라는 고려 때부터 불린 명칭이며 이전에는 ‘탐모라국’이었다.

아울러 발타라 존자가 500나한과 함께 상주했다는 곳은

한라산의 불래(佛來)오름이다.

한라산(漢羅山)도

500나한이 바위가 되었다는 기암의 유래에서 비롯됐다.

알다시피 제주의 옛 지명은 탐라(耽羅)다. 그러나 탐라란 지명의 출처가 불교의 경전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려대장경> 제30권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密多羅所說法住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탐몰라주 발타라 존자는 부처님 열반 후 중생들이 삼보를 호지하는 데 정법 수행할 바를 설하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선정에 들어 중생들을 제도하고 계시며 석존께서 열반하실 때 무상법을 16대 아라한과 그 권속들에게 부촉하시어 수미산을 중심으로 16개국 정법이 머무는 법주도량에 파견하셨다.” 탐몰라주는 탐라국을 가리킨다. 탐라는 고려 때부터 불린 명칭이며 이전에는 ‘탐모라국’이었다.

아울러 발타라 존자가 500나한과 함께 상주했다는 곳은 한라산의 불래(佛來)오름이다. 한라산(漢羅山)도 500나한이 바위가 되었다는 기암의 유래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현재 한라산의 어원에 관한 상식은 ‘손을 들어 은하수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높다는 뜻’이다. 불교가 말끔하게 탈색됐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인들이 제주도의 실체를 알았다는 점도 긴가민가하지만 졸지에 뒤바뀐 어원도 의뭉스럽다.

제주도는 관광의 섬이자 불심(佛心)의 섬이다. 인구 55만 가운데 불자가 30만을 헤아린다. 한때 ‘당 오백(五百) 절 오백’이란 말이 회자됐다. 신당(神堂)과 사찰이 번창했다는 증거다. 바다와 맞서 싸워야만 연명할 수 있었던 섬사람들이다. 그들은 법당의 부처님에게서 피붙이의 횡사와 신산한 생계를 위로받았다.

땅은 가난했고 길은 막혔다. 뭍은 가난한 땅에서도 기어이 무언가를 뽑아먹었고 뽑아먹으러 갈 때만 길을 냈다. 절대적 열세의 상황에서 백성들에겐 갓 잡은 생선을 토막 내는 게 ‘수행’이었고 형제를 죽인 원수 앞에 죽창을 드는 게 ‘불사’였다. 먹고 사는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생명은 없고, 실존에 앞서는 교리는 없다. 그래도 섬이 더는 거칠어지지 않았으면. 입에 묻은 피와 밥풀을 어서 걷어냈으면 하는 무력한 기대. 봉림사를 ‘분칠한’ 자연처럼 말이다.

서귀포=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28호/ 5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