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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남원 실상사의 석장승

 

남원 실상사의 석장승

남원 실상사 인근에 서 있는 석장승 3기. 왼쪽은 해탈교 밖에 있는 장승. 가운데와 오른쪽은 해탈교 안쪽에 좌우로 서 있는 장승이다.

 

 

일그러진 장승 모습, 민중의 모습 보는 듯

 

 

‘어느 날 임금과 신하가 오누이를 외딴 섬에 가두면 어떻게 될까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남매관계를 유지하리라고 주장한 장승상의 자녀가 실험대상으로 지명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누이에겐 자식이 생겼고 장승상은 자결했다. 임금이 인륜의 중요성을 계몽하기 위해 장승상의 모습을 돌이나 나무에 본떠 전국에 세웠다.’

장승의 기원에는 설이 분분하다. 장성.벅수.법수.당산할아버지.수살목 등 별명도 많다. 역사의 불확실성은 뒤춤으로 음습한 풍설을 키웠다. 남근과의 형태적 유사성에서 추출한 패담이 주종이다. 백성들은 미끈하게 뽑힌 솟대를 보며 출산과 풍요를 빌었고, 관습은 솟대를 매개로 근친상간의 패악을 가르쳤다.

인간의 본성이면서도 본성이어서는 안 되는 성(性)에 대한 이중적 관점이 드러난다. 지역 간의 경계표나 이정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는 게 장승에 관한 가장 ‘바람직한’ 추정이다. 어느 산하에서나 발견되는 장승은 하나같이 그악스러운 외모다.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허상을 쫓기 위해 허상을 이용한 셈이다. 이제는 아무도 귀신을 믿지 않고 장승은 쓸모가 없어졌다.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장승은 옛것으로 완연히 도태됐다. 허상을 잃어버린 실상은 쓰레기에 가깝다.

 

절 안 왼쪽 장승의 얼굴이 길다기보다 넓다는 점을 제외하면

세 장승 모두 비슷한 크기와 외모를 가졌다.

당시 민중의 생활환경처럼 허술하고 투박하다.

‘괴엄(魁嚴)하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장승의 얼굴은 으레 심하게 뒤틀리고 패인 게 정석이다.

반면 실상사의 석장승은 무섭기는커녕 어딘지 애처롭기까지 한 품새다.

고대의 마을에서 쉽게 마주쳤을 법한 얼굴들이다.

못 생겼고 피로해 보인다.



실상사(實相寺)의 석장승은 1969년 12월 중요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됐다. 모두 3기다. 높이는 3m에 조금 못 미치고 둘레는 2m에서 몇 치가 빈다. 실상사는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를 기점으로 절의 안팎이 나뉜다. 석장승은 해탈교를 건너기 전에 1기, 건넌 다음엔 2기를 만날 수 있다. 본래 절 밖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1936년 홍수가 났을 때 만수천으로 떠내려갔단다. 으레 남녀 쌍으로 장승을 세우는 게 관행인데 실상사 장승은 남성뿐이다. 현지에서는 주로 벅수로 불린다. 벅수는 ‘복수(卜水)’의 변형으로 짐작된다. 주술적이다.

한편으론 바보라는 뜻도 있다.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는 특성을 꼬집은 것이다. 석장승은 돌이 지닌 내구성 덕분에 형태가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다. 하긴 애당초 치밀하게 깎고 새긴 것이 아니니 닳고 삭을 것도 없다. 절 밖의 장승은 긴 얼굴에 크고 둥근 두 눈이 튀어나왔다. 눈만큼이나 코도 크고 벙거지 비슷한 모자를 썼다.

절 안의 장승들은 수호신으로서의 신분이 뚜렷하다. 왼쪽 장승에는 ‘大將軍(대장군)’, 오른쪽 장승에는 ‘上元周將軍(상원주장군)’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절 안 왼쪽 장승의 얼굴이 길다기보다 넓다는 점을 제외하면 세 장승 모두 비슷한 크기와 외모를 가졌다. 당시 민중의 생활환경처럼 허술하고 투박하다.

‘괴엄(魁嚴)하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장승의 얼굴은 으레 심하게 뒤틀리고 패인 게 정석이다. 반면 실상사의 석장승은 무섭기는커녕 어딘지 애처롭기까지 한 품새다. 고대의 마을에서 쉽게 마주쳤을 법한 얼굴들이다. 못 생겼고 피로해 보인다.

<사진>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실상사 전경.

실상사 종무소에는 사찰 전경을 찍은 항공사진이 걸려 있다. 사찰을 중심으로 사방이 허허벌판이다. 고찰들은 산중에 있는 게 상례지만 예외적으로 평지 한복판에 자리했다. 실상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의 거점이다. 서기 893년 찬술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는 “북산에는 도의요, 남악에는 홍척”이라고 기록했다.

실상사를 개창한 홍척(洪陟)은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는 도의국사에 필적하는 인물이다. 도의국사가 설악산에서 가지산문을 열었을 때 그는 지리산을 택했다. 한국 선의 태동으로 일컬어지는 구산선문은 나말여초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한 신행결사였다. 선종이라는 신사상을 토대로 사회개혁을 주도했다. 최치원은 당시 선사들을 두고 “덕이 두터움은 중생에게 부모가 되고, 도의 높음은 국왕에게 스승이 됐다”고 상찬했다.

홍척의 제자인 수철(秀徹)과 편운(片雲)을 통해 실상사의 전법은 더욱 융성했다. 이들은 후백제의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상사가 영광을 누린 시기는 어쩌면 홍척 이후 3대간 100년이 전부다. 산이라는 울타리를 만나지 못한 절은 외침으로부터 속수무책이었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실상사도 같이 희생됐다. 겨우 중건됐다가 유생들의 방화로 없던 일이 돼버렸다. 해방 후 빨치산 부대가 지리산 산간마을 주민들을 실상사 근처로 이주시키고 산등성이를 개간해 무상으로 분배했다고 전한다. 주민들이 공으로 얻은 토지는 절 주변에 울창했던 송림을 초토화한 결과다.

옛 사람들은 땅을 영적으로 읽었다. 기를 믿었고 혼을 기렸다. 오로지 시세로만 땅의 가치를 매기는 오늘날에 비하면 자못 성스러운 시선이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인 도선국사는 한반도의 정기가 지리산 천왕봉을 거쳐 일본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여겼다. 왜구의 창궐이 실제적인 증거였다. 지리산 12대 명혈(名穴)에 불상과 불탑을 봉안했다는데 실상사가 그 중 하나라는 전설. 보광전 내 동종 역시 왜구로부터의 안전을 바라며 조성한 영물(靈物)이다.

범종에는 한국과 일본의 지도가 새겨졌다. 종을 치면 일본은 쇠하고 우리는 흥한다는 신탁(神託)을 불어넣었다. 현재의 종은 1967년 실상사 경내 약사전 부근에서 발견된 파편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실상사 철제 약사여래좌상은 보물 제41호다. 실상사 2대조 수철스님이 무려 4000근(2.4�F)의 철을 들여 만들었다는 부처님이다. 엄청난 근수는 신뢰와 기대의 부피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을 치유하고 현실의 고통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적인 ‘영험’으로 기능하기에 민중들에게 사랑받는 부처님이다. 약사여래가 봉안됐다는 사실은 지역의 생태가 유난히 고단했으리라는 반증이다. 군데군데 녹슬었어도 전체적인 태는 어엿한 철불(鐵佛)이다. 석장승은 철불의 규모와 질감을 따라오지 못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간의 욕망도 진화한다. 좀더 거대하고 그럴듯한 신(神)을 요구하게 된다. 욕망의 정점에 물신(物神)이 서 있다.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은 거대하고 기괴한 석상들로 유명하다. 온난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 무엇보다 200여개에 달하는 석상들로 미루어 문명의 됨됨이가 상당했으리란 추측이다. 그러나 섬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여전히 불가사의다.

석상들을 건립하느라 생산력을 탕진했기 때문에 멸망했으리라는 학설이 탄력을 받는 중이다. 섬에 정착한 원주민은 생존을 위해 무분별한 벌목을 단행했다. 나무가 사라지자 열매와 짐승이 사라졌고 생태계는 조금씩 으깨졌다. 무명 중생들은 터전이 척박해지는 이유를 스스로의 잘못이 아닌 신의 노여움으로 돌렸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우상의 건립에 매달렸고 광기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인간은 자아와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본능을 지녔다. 불행을 스스로 용납할 수 있도록 순치해 극복하려는 요량이다. 극도의 불행은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다. 불교 역시 ‘업보’라는 개념으로 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빠져나갈 길을 터주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에 따라 현재와 미래가 결정된다는 가르침은 개인의 성실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보다 체계적이고 ‘배신은 죽음’의 논리보다 온정적이다. 이스터의 사람들은 자신을 믿지 않고 살피지 않았다. 그들이 우상에 정력을 쏟아 부을 때 현대인들은 자본의 힘을 맹신한다. 이스터의 멸망은 전방위적인 난개발로 위기에 몰린 지구의 상황에 자주 비유된다. 어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면 다시 장승이 대접받는 세상으로 회귀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남원=장영섭 기자

 

[불교신문 2432호/ 6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