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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연변, 신흥법당 수월정사 개원현장을 가다

 

연변, 신흥법당 수월정사 개원현장을 가다

 

 

중국 연변 조선족 사람들은 수월음관(水月音觀, 1855~1928)스님을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른다. 고통스러워하는 중생을 위해 한없는 보살핌을 베푼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수월스님은 “살아남기 위해” 또는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넘는 사람들을 위해 보현행을 베풀었다. 서울 봉은사(주지 명진스님)는 연변 신흥법당 수월정사 개원에 맞춰 지난 5월26일부터 29일까지 ‘수월선사 행화유적지’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 지난 5월27일 개원한 신흥법당 수월정사 전경. 3층 건물로 불교용품점, 다실, 회의실, 대법당 등을 갖추고 있다.

 

 

 

“중국 조선자치주에 ‘한국불교 법등’ 밝혔다”

  독립운동 위해 두만강 넘은 수월스님 뜻 이어

  연길시에 3층 규모…연변불교 구심 역할 ‘기대’
 


 

오전 11시, 연길공항에 도착한 순례단은 곧장 도문시 국경지대로 향했다. 두만강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 하나로 중국과 북한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점이다. 간단한 신분확인 절차를 마친 일행은 다리의 중간지점까지 걸어갔다.

‘접경선’. 중국땅은 자유롭게 밟을 수 있지만, 우리의 땅 북한으로는 들어설 수 없었다. 100여m 앞에는 농사일을 하는 북한 주민의 모습이 선연했다.

 <사진> 지난 5월27일 중국 연길시 신흥법당 수월정사 개원법회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비롯해 한국불교계와 연변지역 불자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됐다. 

그 경계선에서 수월스님 행화유적지 순례가 시작됐다. 일행은 두만강을 건너 연변에 초막을 세운 수월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다시 중국 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10여분 차로 이동해 일행이 도착한 곳은 일광사 화엄사터다.

수월스님은 100여년 전인 1912년 조선을 떠나 일광산에 사찰을 건립했다. 사찰이라고 부르기도 못한 초막(草幕)이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일제의 압박을 피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연변에 온 사람들을 맞이했다.

연변지역 불자들이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는 화엄사터는 산 중턱에서 차에서 내려 20여분을 걸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10년여 전, 90세 노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찾아냈다는 화엄사터에는 축대 기단과 작은 우물만이 남아 있었다. 스님이 지었다는 작은 초막의 흔적은 스치는 바람처럼 날라가고 없었다.

<사진> 수월스님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오는 조선동포들을 위해 주먹밥과 짚신을 무주상보시하며 머무른 화엄사터. 지난 5월26일 이곳에서 수월스님을 추모하는 의식이 봉행됐다.

초막에서 산 위로 3분여 오르면 깍아지를 듯한 절벽이 마주한다. 절벽을 따라 옆으로 돌면 바로 두만강으로 이어진다. 수심이 얕고 폭이 좁은 위치라서, 족히 걸어서 건널만한 곳이다. 그곳 어디쯤, 수월스님이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도하하는 사람들을 위해 쌓아놓았다는 바위가 있으리라.

수월스님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무리한 일행은 김소월의 서시가 적힌 ‘시비(詩碑)’가 남아있는 용정중학교를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5월27일, 순례단은 연길시내 신흥가에 위치한 수월정사를 찾았다. 과거 일제투쟁의 거점이었던 연변에 들어선 “제대로 된 최초의 법당”이다. 종교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이후 수백개의 교회가 들어섰지만, 정작 신행공간을 제대로 갖춘 사찰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사진> 국경지역을 둘러보고 있는 총무원장 지관스님 일행.

연길에 사찰건립은 15년 전부터 연변지역 불자들이 법당건립을 서원했다가 여러 이유로 무산됐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불교협회가 정부의 허가를 얻어 설립되고, 서울 봉은사와 조계사, 도선사, 여수 흥국사의 지원에 힘입어 3층 규모의 건물을 매입, 이날 개원식을 갖게 됐다.

이날 3층 법당을 꽉 채운 연변 불자들이 고운 한복을 입고 법회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경기 철원 원심원사 주지 세민스님의 집전으로 상단불공 및 위령제를 지내고, 이어 연변 가무단 합창단의 찬불가에 맞춰 법회가 진행됐다.

“10년전 화엄사터에서 1주일간 화엄사 복원을 기원하며 기도를 올린 적이 있다”는 한 노보살은 “불당이 마련돼 너무 기쁘다. 수월스님의 보살핌으로 연변의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며 감회를 전했다.

<사진> 지난 5월27일 열린 수월정사 개원법회에 참석한 연변 불자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이날의 ‘감격’을 맞이했다.

법회를 마치고 순례단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 순례에 나섰다. 일행은 5월28일 새벽6시 백두산 지역 위령제를 갖고 “백두산에서 희생된 모든 생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백두산 정상과 장백폭포 등을 관람했다. 백두산 천지에서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남북통일이 조속이 이뤄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순례단은 이날 저녁 연길에서 열린 ‘한중불교우호증진행사’를 끝으로 회향했다. 민광도 연변자치주종교주장, 김현 연변자치주종교국 국장 등 연변불교계 인사들과 김진태 청주지청 검사장 등 내외빈 4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연변불교협회 부회장 지광스님에게 쓰촨성 지진 재해 성금을 전달하고 “조속한 피해 복구와 희생영가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또 “신흥법당 건립은 연변불교를 관할하는 중심을 세운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번 순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의 폭압을 피해 연변으로 건너온 중생들과 함께한 수월스님의 뜻을 새삼 깨우치게 됐다.

연변 불자들도 이 뜻을 이어달라”고 말했다. 이어 김현 국장은 축사를 통해 “현재 연변에는 4개의 사찰과 14개의 불당이 건립됐으며, 앞으로 4개의 사찰을 추가로 건립할 예정이다”고 밝히고 한국불교계의 지지와 격려를 당부했다.

<사진> 지난 5월28일 연길시 국제호텔에서 열린 ‘한중불교우호증진행사’.

한편 연변불교협회 부회장 지광스님은 신흥법당 수월정사 건립에 기여한 공로로 서울 봉은사와 도선사, 김진태 검사장, 신옥 연변불교회 부회장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수월스님은 /    일제 때 간도서 중생제도한 ‘보살’


출생에 대해 정확한 행적이 알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불교사전>에서는 조선 철종6년인 1855년 충남 홍성군 구항면 신곡리 전(田)씨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탁발을 나온 한 스님에게 감화돼 서른살 즈음에 천장암으로 출가해 태허스님을 은사로 음관(音觀)이란 법명을 받았다. 김진태 청주지청 검사장은 <물속을 걸어가는 달>을 통해 스님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수계와 관련한 신이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 흥국사 회주 명선스님이 고증을 통해 제작한 수월스님 진영.

어느 날 밤 늦게 수월스님이 천수다라니를 염송하며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 밤 천장암 주지 태허스님이 자정이 다 되어 절에 돌아왔는데, 물레방앗간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봤다. 그런데 물은 세차게 물레방아에 떨어지고 있건만, 웬일인지 방앗공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보니 방앗공이가 금방이라도 내리찍을 듯 허공에 매달려 있고, 수월스님이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태허스님이 황급히 수월스님을 끌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앗공이가 돌확을 내리찧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음날 태허스님은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수월스님을 위해 수계식을 열었다. 이후 천장암에서 경허스님의 법제자가 돼 수행에 든 스님은 이레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용맹정진에 들었는데 이때 온몸에서 거대한 방광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은 스님이 열반에 들자 7일간 사리가 방광하기까지 몇 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한다.

경허스님에게 수월(水月)이란 법호를 받은 스님은 1912년 간도로 넘어가 화엄사를 창건했다. 근대 고승이었던 효봉, 금오, 청담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간도를 찾아 수월스님에게 법을 청한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그때마다 스님은 손수 지은 밥을 싸서 걸망에 넣어주고, 짚신을 들려주며 합장하며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했단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스님과의 일화. 주먹밥과 짚신을 받아 든 청담스님이 수월스님께 절을 올리자 수월스님은 갑자기 곳간에서 괭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청담스님이 괭이를 가져오자 수월스님은 마당의 돌맹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게 무엇이냐” “돌맹이입니다” 청담스님이 대답하자마자 수월스님은 괭이를 빼앗아들더니 돌맹이를 쳐내 버리고 그길로 들판으로 나갔다고 한다. 청담스님은 일생동안 이를 화두로 삼아 정진했다고 한다. 수월스님은 1928년 흑룡강성에서 입적에 들었다.

 

 

총무원장 지관스님 법어 (요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니… 참된 보살의 자취 따르자”

달이 일천 강에 비치니, 물속에 비친 달은 그 실체가 어디에 있는가. 오늘 우리는 참된 보살의 위대한 자취를 따라 여기에 왔습니다. 그 분이 바로 수월스님입니다. 왜 스님을 참된 보살이라 하는가. 그것은 스님이 교화함이 없이 교화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수월스님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거창한 법문도, 심지어는 스님의 출신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름 그대로 물 위를 가는 달처럼 자취도, 흔적도 찾기 어렵습니다.

모래알처럼 무수한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그들의 아픈 발에 무진수의 짚신을 삼아 신겨주었지만, 수월스님은 일생을 들어 자신이 행한 가없는 자비행을 자비핼이라 말한 흔적이 없고, 자신을 내세운 적도 없습니다.

서산의 천장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스님께서는 세가지 특별한 힘을 얻었는데,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념지(不妄念智)를 얻었고, 잠이 없어져 버렸으며,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후 천장암을 떠나 유점사에 머물렀지만 신분을 숨긴채 여전히 땔나무를 해 나르며 한철을 지냈습니다.

스님께서 두만강을 건너 이곳 간도 땅으로 온 것은 1912년 경이라고 합니다. 그 후 스님은 마을 사람의 옷차림을 하고 소먹이꾼 노릇을 하며 밤마다 짚신을 삼고, 낮에는 짬짬이 큰 솥에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일제의 억압을 피해 살 곳을 찾아 간도로 건너오는 동포들을 위해 길가 바위위에 주먹밥을 쌓아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묵묵히 실천하였습니다.

스님의 자비행은 1912년 도문시의 회막동으로 들어간 이래 흑룡강성 수분하, 간도 나자구로 이어지며 1928년 열반에 드는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이와 같은 수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분별심을 없애고 상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를 진실로 보여주신 보살의 화신이 바로 수월스님입니다.

달이 일천강을 비추지만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를 그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이 수월스님은 그 가없는 보살행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실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스님의 자비의 그림자는 간도 땅 어느 한곳에 드리우지 않은 곳이 없는 위대한 성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법회를 계기로 우리는 참된 자비심과 진정한 보살행의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와 남을 가르고 작은 실천을 내세우는 일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천강에 모습을 드리운 달이 아무 말이 없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좀 더 고결하고 자비로운 삶으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월스님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소리없는 설법인 것입니다.

길림성 연길=안직수 기자



[불교신문 2431호/ 6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