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바다의 돌격대 의승수군 주둔지 여수 흥국사

“이 절이 잘되면 나라가 잘되니 …”
여수 흥국사 홍교(보물). 길이 40m, 높이 6.5m, 폭 4m의 반원형 홍예교로 사찰의 무지개 다리중 제일 크고 길다. 쌓아 올린 돌 하나하나가 힘을 뭉쳐 전라 좌수영을 사수한 의승수군처럼 당당하다.

여수 하면 떠오르는 것이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과 낭만의 여수 밤바다이다. 이런 아름다운 밤바다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이순신 장군과 바다의 돌격대 흥국사 의승 수군이 피로 지킨 바다이기에 더욱 가고 싶은 곳이다.

여수 흥국사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이 절이 잘되면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이 절도 잘 될 것이니 이름을 흥국사라 한다”고 말해 흥국사는 나라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공동운명체임을 분명히 했다. <불설 뇌타화라경>에 “백성의 풍요를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호국”이라 했기 때문이다. 특히 흥국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자원입대한 의승수군 400여명이 조직한 특수부대가 있었다. 유격 별도장 의능, 시호 별도장 삼혜 두 스님이 대장을 맡았고, 우 돌격장 성휘, 좌 돌격장 신혜, 양병용격장은 지원스님이 맡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삼혜스님은 거북선을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이순신 장군이 여수 앞바다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의승수군의 빛나는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물전시관에는 1593년 겨울 이순신 장군이 쓴 ‘공북루’ 편액이 있어 주목받고 있다. 의승군의 활약에 두려움을 느낀 왜적은 정유재란 때는 우리나라의 사찰을 거의 불태워버렸다. <흥국사 중수사적>에는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절은 무너지고 기와는 흩어져서 그 장엄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다. 거쳐하는 스님들과 남아있는 물건들은 하나도 남겨진 것이 없어 빈산에 달만 오고가는 구나”라고 안타까워했다.
 


대웅전 마당의 ‘찰간 지주대’. 막 땅을 뚫고 올라온 용의 상서로운 비늘, 크게 뜬 눈, 아래 위 꽉 다문 앞니 등 역동적인 모습이 눈길을 끈다.

➲ 사찰 무지개 다리 중 최고 ‘홍교’

이런 어려움을 딛고 1624년 계특 등 흥국사 스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중창됐다. 먼저 들어가는 입구 흥국사 홍교는 보물로 1639년에 쌓았는데, 사찰의 무지개 다리중 제일 크고 길어 계곡에 무지개가 떠 있는 듯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홍교는 길이 40m, 높이 6.5m, 폭 4m의 반원형 홍예교로 시냇가 자연 암반위에 긴 장대석을 놓고 그 위에 86개의 홍예석이 맞물리도록 했다. 쌓아 올린 돌 하나하나가 힘을 뭉쳐 전라 좌수영을 사수한 의승수군처럼 당당하다. 특히 다리 앞뒤 쪽에 보초를 선 용과 홍예종석에는 대장 용이 조각되어 흥국사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잡아 의승수군의 군사작전을 보는 듯 재미를 준다.

일주문을 지나 왼쪽 언덕 늙은 소나무 아래에는 창건주 보조국사, 중창주인 법수스님 등 12기의 부도가 있다. 부도는 단순, 소박하지만 보배구슬 위에 연꽃이 피어오르고, 지붕돌 망와에는 웃는 얼굴, 눈알을 부라리는 귀면이 새겨져 있어 재미있다. 개울가 옆의 흥국사 중수사적비는 1703년에 성능대사가 건립했다. 비문에는 보조지눌, 1560년 법수대사의 증축, 임진왜란 이후 1624년 계특스님의 중건, 1690년 통일대사의 대웅전 확장 등 사찰 중건에 힘쓴 분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귀부의 용머리, 육각무니 등과 4개의 발은 노를 젓는 것처럼 느껴져 거북선을 연상케 한다.

대웅전 앞마당 돌로 만든 찰간 지주대는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막 땅을 뚫고 올라온 용의 상서로운 비늘, 크게 뜬 눈, 아래 위 꽉 다문 앞니, 솟아 오른 뿔, 벌렁거리는 코 등 역동적인 자세는 찰간을 잡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쓰는 표정이 재미있다. 이 찰간에 1759년에 조성된 보물 ‘흥국사 노사나 야단법석불화’를 걸었다. 가로 9.92m, 세로 12.71m의 크기로 화면 가득 독존 노사나불이 보관을 쓰고 양손을 들어 법을 설하는 모습이다. 맑은 눈, 반달눈썹, 백옥 같은 흰 피부는 눈이 부실 지경인데 신광 주변의 오색 빛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보관엔 여섯 분의 화불과 불꽃영락이 화려하고, 목에 걸친 영락과 꽃으로 기워 입은 붉은 색 가사와 양 옆에 솟아오른 보탑은 <법화경>을 설하는 장엄된 몸을 나타냈다.
 

대웅전. 1690년 통일대사가 확장한 흥국사의 중심 건물로 다포양식에 짜임이 화려한 보물이다. 앞문의 청동 문고리를 잡으면 삼악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 삼악도에 태어나지 않으려면…

대웅전 앞 장명등은 용머리와 거북 형태의 등에 사각 간주석을 세운 후 사천왕이 장명등의 지붕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 특이하다. 진리의 등불을 지고 중생들이 극락에 태어날 수 있도록 온힘을 다하여 이끄는 용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곧추 세운 고개는 힘이 드는지 숨을 몰아쉬는 듯 이빨을 드러내고 있어 재미있다.

대웅전은 1690년에 통일대사가 확장한 중심 건물로 다포양식에 짜임이 화려한 보물이다. 앞면에는 사분합문을 달아 전면을 개방하고, 아래에는 모두 궁창판에 격자교살문을 설치했으며, 그 위로는 교살창을 달아 아름답게 꾸몄다. 대웅전 앞문의 청동 문고리를 잡으면 삼악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옛 말이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등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모셨는데 1628~1644년 사이에 조성된 보물이다. 이들 수기삼존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이 이곳에 상주하는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후불화는 1693년에 천신, 의천스님이 비단바탕에 가로 4.27m, 세로 4.93m의 크기로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면으로 보물이다. 모든 성중들이 경건하게 부처님의 설법에 귀 기울이는데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만은 고개를 돌려 이 법석에 누가 왔는지를 살피고 있다. 홍조 띤 얼굴에 부드러운 눈길, 미소를 머금은 입술, 투명 광배에 화려한 보관은 연인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가슴이 설렌다. 두 보살의 ‘돌출 행동’은 엄숙함의 격을 깨는 인간적인 정이 느껴진다. 올 여름에는 ‘여수 밤바다’를 거닐며, 흥국사에서 제화갈라, 미륵보살과 눈을 맞춰 봄직도 하다.

대웅전 불단 뒤편에는 흙벽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 위에 가로 3.36m, 세로 3.89m 크기의 백의관세음보살을 모셨다. 1700년대 중반에 그려진 보물로 관세음보살이 손 크기 정도의 선재동자를 바라보며 대화하는 모습은 자비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연꽃을 밟은 커다란 발과 흰 치마 자락에 수많은 작은 연꽃을 수놓은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포벽의 ‘시주 뢰헌비구’는 의승수군장으로 1696년 안용복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스님이다.

➲ 뢰헌 비구 “독도는 조선 영토”

또한 1703년 흥국사 중수에 시주자로 스님들과 사대부, 불자들의 이름이 포벽에 기록되어 특이하다. 스님들은 대웅전 중수를 위해 탁발, 재, 토지 개간 등으로 생긴 수입과 계를 조직하여 돈을 모아 절을 지었다. 특히 포벽에 ‘시주 뢰헌비구’는 의승수군장으로 1696년 안용복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스님이다.

<광찬경>에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중생들을 위하여 서원의 갑옷을 입고 스스로 힘써 행하여야 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여수 흥국사 의승수군이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한 서원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서 펼친 활약은 경이로움을 넘어서 신이했다. 여수 흥국사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아끼는 사찰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불교신문3678호/2021년8월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