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탑에서 무수한 성보 쏟아져 나온 남양주 수종사

‘동방제일 전망 사찰’에서 시 한 수 지어볼까…

√ 동남쪽 봉우리에 석양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 강 위 햇빛이 반짝이며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고
√ 한밤중 달이 대낮처럼 밝아 주변을 보는 즐거움
- 정약용이 말하는 ‘수종사의 세 가지 즐거움’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전경. 조선시대 대문호 서거정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로 꼽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운길산(雲吉山, 610m) 8부 능선에 있는 수종사(水鍾寺)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 물의 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뛰어난 곳에 지어진 옛 절이다. 1458년 세조가 금강산을 다녀오는 길에 이곳 두물머리 용선에서 새벽에 범종소리를 들었는데 다름 아닌 바위굴 속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공명을 일으켜 종소리처럼 크게 들렸다고 한다. 세조는 이 굴속에서 18나한상을 발견하고 1459년에 절을 크게 중창하여 절 이름을 수종사라 했다. 그때 세조가 직접 심었다는 5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는 높이 35m, 둘레 6.5m로 우람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 한강의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수종사 사리탑에서 나온 사리병, 사리내함과 외함.

➲ ‘수종사 세존사리탑’

대웅보전 서쪽에는 1439년 조성된 ‘수종사 세존사리탑’에서 1939년에 부처님의 사리와 사리장엄이 발견됐다. 부처님 사리14과를 수정 사리병에 넣고, 이것을 사리 내함인 금동 구층소탑에 넣고 다시 은제도금 육각 사리 외함에 넣은 후, 사리 외함을 청자호에 넣어 교리에 따라 탑 속에 봉안한 세존사리탑임을 알 수 있다. 봉안한 기록을 두터운 지붕돌 옆면에 새겼는데 의역하면 “태종 이방원과 의빈 권 씨의 딸인 정혜옹주의 극락왕생을 위해 부처님의 사리탑을 문화류씨와 금성대군이 세종 21년(1439) 10월에 조성하였다”로 해석된다.

의빈 권 씨의 유일한 자식 정혜옹주는 1424년에 꽃다운 나이로 죽었고, 옹주의 무덤은 남편 박종우와 합장(合葬)되어 경기도 연천에 있다. 의빈 권 씨는 죽은 딸을 위해 사후 16년 만에 세존사리탑을 조성했다. ‘정혜옹주사리탑’ 또는 ‘수종사 부도’로 지칭하고 있는데 아주 잘못된 표현이다. ‘수종사 세존사리탑’이라 해야 한다. 이 사리 장엄은 현재 보물 제259호로 지정되어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뒤쪽에 사리탑도 보인다.

➲ 층층 금동불…팔각오층석탑

그 옆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속에는 층층마다 금동부처님이 가득 모셔져 있었다. 1957년 해체과정에서 초층 탑신석에서 금동불감, 그 속에서는 석가모니불, 반가사유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금동삼존불이 발견됐다. 특히 석가모니불 대좌 바닥에는 ‘시주 명빈 김씨(施主 明嬪 金氏)’의 명문이 있고, 복장 안에는 성종의 후궁들인 숙용 홍씨, 숙용 정씨, 숙원 김씨가 1493년에 발원한 복장발원문이 나왔다.

“성종 24년 유월 3인이 성종의 수명장수와 자식들이 복락을 누리길 바라며, 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구를 점안하여 불탑에 안치하니,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1493년은 성종의 후궁 명빈 김 씨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이 지난 후로 독실한 불자였던 명빈 김 씨는 궁중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원불로 모셨고 나중에 <법화경>의 교리에 따라 지장보살과 미륵보살 삼존불 형태를 취하여 크기와 형태에 차이를 보인 것 같다.

불감 내부에는 부조로 선정인, 항마촉지인, 설법인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둥글게 했고, 주변에는 붉은 불꽃을 표현했다. 불감 뒷면에는 설법인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과 가섭·아난 두 제자와 대좌 양 옆으로 합장하고 있는 네 보살과 두 제자들이 있어 법화경의 영산회상을 나타냈다. 불감의 문에는 화염 속 금강저를 쥔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역동적인 자세로 문을 지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성종의 후궁들은 명빈 김 씨의 원불을 중수함과 동시에 목조로 관세음보살, 스님, 비사문천왕을 조성하여 수종사 불탑에 봉안했다.

이와는 별개로 1628년 인목대비가 이 불탑에 24분의 불보살상을 모셨다. 1957년에 기단 중대석에서 8분, 초층 지붕돌에서 4분, 1970년에 2층 지붕돌에서 9분, 3층 지붕돌에서 3분의 금동 불보살상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이토록 많은 불보살상이 한 불탑에서 발견된 경우는 없었다. 또한 조성연도와 발원자가 명확하고, 한 불탑에 시대를 달리하여 두 번 불보살상을 봉안한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 놀랍다. 이렇게 많은 불보살상을 모시게 된 사연에는 선조왕의 계비 인목대비의 비원(悲願)이 숨어 있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나온 삼존불 불감.

➲ 인목대비의 간절한 비원…

광해군은 1613년에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 대비의 형제들을 죽이고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를 10년간 서궁에 유폐시킨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는 계축옥사로 죽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딸 정명공주와 남아있는 상궁들의 수명장수와 일체의 재난이 소멸되기를 기원하며 많은 불보살상을 불탑에 모셨다.

이 불탑 속 형상불은 1628년 4월에 인목대비가 시주한 안성 칠장사 오여래야단법석불화의 형식에 따라 조성하여 같은 해에 수종사 불탑에 봉안했다. 오여래야단법석불화 상단의 삼신불화에 따라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보살 형상불을 조성하여 연화장세계를 표현했다. 중단의 약사불화에 따라 약사삼존 형상불을 조성하여 동방정유리세계를 표현했고 보관에 삼족오와 토끼를 새겨 넣었다. 또한 아미타불화에 따라 아미타삼존 형상불을 조성해 극락세계를 표현했는데, 보관에 아미타불과 정병을 새겨 넣었다. 불화 하단의 관음, 지장, 스님의 모습은 관음, 지장, 스님의 형상으로 조성했다. 더불어 별도로 선정인과 설법인의 부처님을 조성하여 선교(禪敎)를,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마타불 삼세불을 조성하여 인목대비의 중생구제 발원을 표현했다. 참으로 대단한 발원이다. 인목대비는 10년의 세월을 서궁에 유폐되어 고통스런 나날을 사경과 염불로 참고 견디었다. 이처럼 인목대비의 간절한 비원이 서린 불탑이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이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나온 약사여래삼존불.

➲ ‘동방제일 전망’…세 가지 즐거움

수종사는 세조이후 왕실의 원찰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풍광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갔다. 사계절 내내 꽃·신록·단풍·설경이 아름답고,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신비스러운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자랑했고, 초의선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시를 짓고 차를 마시며 주변 경관을 마음에 담았다. 정약용은 수종사의 세 가지 즐거움을 “동남쪽 봉우리에 석양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는 즐거움, 강 위에 햇빛이 반짝이며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즐거움, 한밤중 달이 대낮처럼 밝아 주변을 보는 즐거움”이라 했다. 사찰의 아름다움이란 가서 볼 때 마음에 담아 둘 수 있다.

수종사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은 잡맛이 없고 물이 달고 시원해서 찻물로 사용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삼정헌(三鼎軒) 다실에는 무료로 직접 차를 무려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하여 초의선사의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삼정’은 삼정승을 말하는데 차의 삼정승은 차를 자신의 호로 쓴, 다산 정약용, 동다송을 짓게 한 정조의 부마 홍현주, 차의 신선 초의선사라 말할 수 있고 이들이 수종사에 와서 차를 마셨던 집이라는 뜻일 것이다.

[불교신문3676호/2021년7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