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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남원 선국사의 교룡산성

 

남원 선국사의 교룡산성


선국사(善國寺)는 성(城) 안에 있는 절이다. 성벽은 부처님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불교를 무너뜨린 자들의 소유였다. 성은 절보다 늦게 섰지만 체제에 기대어 절을 부렸다. 누각은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망루로 사용됐다. 조선이 망하고 난 뒤 성은 쓸모가 없어졌다. 절은 성의 규모와 질감에 힘입어 풍광이 남다르다. 이제는 절이 성을 부린다.

                 
                          

지키는 자와 뺏는 자의 ‘상흔’


자비의 품에서 치유를 꿈꾸다




남원 교룡산성은 전라북도기념물 제9호다. 해발 518m 교룡산(蛟龍山)의 험준한 기세를 3120m의 둘레로 끌어안았다. 축성의 내력은 분명치 않다. 남원시는 백제 때 고룡군(古龍郡)으로 불렸다. <삼국사기> 등 사서에 보이는 교룡(蛟龍).거물(居勿).기문(基汶)과 같은 명칭은 고룡의 전사(轉寫)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을 이 시절에 쌓았다는 기록은 없다. 교룡산성은 조선왕조부터 정사(正史)에 등장했다.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군창(軍倉)이 있다고 적혔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남원부(南原府) 산천조(山川條)에는 교룡산성이 남원부 서쪽 7리에 있다고 적혔다.

<사진> 교룡산성의 정문이었던 홍예문 안쪽에서 바라본 산성의 성벽.

반면 선국사의 나이는 1400년에 이른다. 신라 신문왕 5년(685)을 창건 시기로 본다. 직할시와 비슷했던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던 해와 같다. 절을 지을 당시 근처에 용천(龍泉)이라는 샘이 있어 이름을 용천사(龍泉寺)라 했다. 훗날 절을 빙 둘러 산성이 쳐진 뒤엔 선국사로 바뀌었다. 선국사란 이름엔 국태민안을 바라는 왕권이 소원이 반영됐다. 사찰은 실제로 성을 지키는 본부로 쓰였다고 전한다. 산성 안에 있는 절이라고 해서 ‘산성절’이라고도 했다. 순조 3년(1803) 대웅전을 중건했고 고종 28년(1891)에는 칠성각을 세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무장한 혁명군의 은신처였다.

교룡산성은 현재 남원지역에 남아있는 20여 개의 산성 가운데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성은 능선의 굴곡에 따라 성벽이 물결치듯 흐르는 형세다. 교룡산의 동쪽 수구(水口)에 동문을 설치했다. 동문엔 옹성(饔城)을 쌓았다. 옹성이란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밖에 따로 원형이나 방형(方形)으로 쌓은 성을 뜻한다. 남쪽에서 성벽을 따라 들어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ㄱ자형으로 꺾인 곳에 홍예문이 있다. 홍예문의 측면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았고, 위쪽은 아홉 개의 돌을 아치형으로 꿰맞췄다. 성 안에는 무려 99개의 우물이 있었다. 유사시 국가는 지역 주민들을 징발해 성을 수호하면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적을 저지했다.

판소리의 고향인 남원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지금은 운암댐으로 수몰된 운암평야가 있어 남북의 왕래를 도왔다. 여기서 해발 200미터짜리 고개 하나만 넘으면 동진강 상류인 칠보에 닿았고 좀더 북상하면 정읍 부안 김제로 통하게 돼있었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사이에 자리해 섬진강 주변의 높고 낮은 고개를 매개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했다. 섬진강 유역의 남원분지는 예로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玉野百里)라 불렸다. 하늘이 정해준 땅이었고 비옥한 들판이 100리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물자는 풍부했고 사람이 모여들 길도 많았다. 남원은 전라도에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고장이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길들은 자의와는 상관없이 이적(利敵)에 종사해야 했다. 과거의 길들은 성이 관리했다. 길을 지나는 것들의 신분과 자격에 따라 성문을 열거나 닫았다.

선국사 주변은 죽고 죽이는 역사로 물들었다.

성벽의 거칠고 단단한 돌들은 불교의 자비와 무관해 보인다.

대웅전 왼쪽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는 별명이 붙었다.

조그만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셈이다.

피와 비명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한 모양이다.



국토의 3분의 2를 뒤덮은 고봉준령을 이용해 적들의 공격을 막는 것이 한국형 전투의 특징이다. 밀덕봉(密德峰) 복덕봉(福德峰) 등이 포진한 교룡산성의 산세는 특히나 삐쭉빼쭉했고 어디서든 엄폐가 가능했다. 천혜의 요새였다. 임진왜란 이후 짤막한 휴전이 끝나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남원성의 관군과 백성은 모두 교룡산성으로 옮겨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의 지휘관 양원은 자신에게 익숙한 평지에서 싸우기를 고집했다. 결국 남원성을 전장으로 택했고 양원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나온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대국 장수의 오판 탓에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삼남 전체가 유린됐다. ‘만인의총(萬人義塚)’이 이날의 참패를 추모한다.

교룡산성은 임진왜란 시절 김제 금산사를 거점으로 승병을 일으킨 뇌묵처영(雷默處英, ?~?)이 중수했다. 선국사도 산성과 함께 손을 봤다. 스님은 서산대사로 잘 알려진 청허휴정(淸虛休淨, 1520~1604)의 제자였다. 임금인 선조가 의주까지 쫓겨 가자 휴정은 전국의 스님들에게 격문을 띄워 궐기할 것을 호소했고, 처영은 1000명의 승병을 모집해 화답했다. 권율과 함께 금산 배고개전투에 참여해 큰 전공을 세웠다.

<사진> 남원 선국사 내경.

1593년 2월 권율의 군대와 수원으로 올라가 독왕산성에서 왜장 우키타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스님의 전적은 그 유명한 행주대첩에서 절정을 이뤘다. 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행주산성의 한 섹터를 담당해 2만4000명의 적병을 죽이거나 해했다. 종전 뒤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이란 시호를 받았다.

전라북도민속자료 제27호인 교룡산성 승장동인(蛟龍山城 僧將銅印)은 선국사 안에 보관돼 있다. 조정에서 처영스님에게 내려준 도장이다. 동학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투로 유실됐다가 1960년 보제루의 마루 밑에서 발견됐다.

홍예문에 들어서면 좁은 비탈길이 나오는데, 길 오른쪽에 비석군이 있다. 교룡산성을 지켰던 역대 무관 별장(別將)들의 기적비(紀績碑)들이다. 사진이 없던 시대 사령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비석군에 맞서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라는 작은 푯말이 섰다. 갑오년 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지도자였던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그는 전봉준 다음 가는 2인자였다. 끝내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패했고 붙잡혀 처형됐다.

선국사 대웅전 안에는 커다란 쇠북이 있다. 특이하게도 하늘색이다. 둘레는 260㎝, 길이 102㎝ 정도다. 몸통은 소나무로 만들었고 양면에 소가죽을 둘러 소리를 냈다.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는 묘연하지만 조선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선국사가 큰 절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다. 평시엔 땅 위에 사는 것들의 행복을 비는 법고(法鼓)였겠지만, 전시엔 땅 위에 사는 것들을 전부 성 안으로 쓸어 담아 희생을 독촉하는 전고(戰鼓)로 쓰였을 것이다.

선국사 주변은 죽고 죽이는 역사로 물들었다. 성벽의 거칠고 단단한 돌들은 불교의 자비와 무관해 보인다. 대웅전 왼쪽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은 어림잡아 500년으로 본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 피어 있어서 백일홍나무라고도 한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는 별명이 붙었다. 조그만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셈이다. 피와 비명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한 모양이다.

남원=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57호/ 9월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