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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양산 용화사의 낙동강

 

양산 용화사의 낙동강

 용화사 위쪽 오봉산 중턱에서 바라본 낙동강.



사람이 만든 철길에 섬이 된 ‘미륵님의 세계’


영남대로란 게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출발해 밀양, 청도, 대구, 문경, 이천, 용인 등을 거쳐 한양에 이르던 옛길이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9개의 주요 도로가 정비돼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960리에 달하는 영남대로였다. 걸어가면 열나흘이 걸렸다. 경상도 지역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기 위해 오르던 길이었고 왜군이 조선을 도륙하기 위해 오르던 길이었다. 물론 길은 대부분의 시간을 양반이나 군인이 아닌 장사치들을 위해 살았다. 전국의 물자가 뭉쳤다 갈라지는 길이었고 영남대로가 발 디딘 고장은 번성했다. 영천과 안동을 지나 죽령을 넘어 서울로 가는 좌로와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서 가는 우로라는 지선(支線)도 있었다.

20세기 한반도에 들어선 철도와 도로는 영남대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만의 길을 갔다. 간혹 겹쳤으나 일부였다. 신문명으로부터 재신임을 받지 못한 도시들은 돈줄이 막혔고 몰락했다. 상주가 경상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감영(監營) 소재지였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의 대구에 필적하던 위세다. 교류와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었지만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엔 착취와 갈등이 더 자주 밟혔다. 길은 누군가에겐 복이었고 누군가에겐 벽이었다.

영남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란 뜻이다. 날아가는 새도 넘기가 벅차다는 문경새재의 아래쪽. 영남대로의 하단은 소백산맥과 낙동강을 중추로 한 산길과 물길이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낙동(洛東)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이다”라고 적었다. 상주는 가야의 속지였다. 낙동강(洛東江)은 ‘가락국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다. 영남을 동북과 서남으로 가르는 낙동강은 압록강보다는 짧지만 남한에선 가장 길다. 총 길이는 521.5㎞, 유역면적은 2만3817㎢다. 강원도 태백 함백산(咸白山)에서 발원한다.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곡류한다.

함창 근처에서 다시 내성천(乃城川).영강(嶺江) 등 여러 줄기를 구심상(求心狀)으로 받아들인 뒤, 유로를 남쪽으로 돌린다. 구심상이란 주변 산지에서 흐르기 시작한 강물이 분지의 중심부에서 합류해 큰 강을 이룬 형상을 일컫는다. 상주 남쪽에서 위천(渭川)을, 선산 부근에서 감천(甘川)을, 대구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을, 남지 부근에서 남강(南江)을 끌어와 동쪽으로 몸을 튼다. 삼랑진 부근에서 밀양강을 끌어안고 남진을 계속해 마침내 남해와 만난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낙동강의 듬직한 물에 의지해 척박한 원시를 견뎠다. 강줄기에 맞닿은 칠곡과 울산, 부산의 영도와 다대포 등지에서 다량의 토기와 패총이 발굴됐다. 강은 가야를 만들었고 가야를 죽인 뒤엔 신라를 완성했다. 일본과의 무역을 담당했고 일본의 침략을 본의 아니게 도왔다. 강은 인간의 분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립될 수도 없었다. 길은 경계를 만들었고 강 역시 사람이 갈라놓은 이편과 저편에서 멱살을 잡힌 채 휘둘렸다.


사람들은 길이 많아지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길이 넘쳐나는 세상은 그저 복잡해질 뿐이었다.

사통팔달이 이뤄져도 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쪽에 길을 내면 저쪽이 울었고

저쪽에도 길을 내주면 이쪽이 갑자기 울었다.

길이 많아지자 답도 많아졌다.

길들은 자기의 길이 정도(正道)라며 서로 충돌했다.



양산 용화사에 가면 길이 역사를 만든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 느낌은 아름답지 않고 씁쓸하다. 새로 난 길 때문에 신세가 난처해진 절이다. 경부선의 ‘만행’으로 쪼그라들었다. 오봉산에 위치한 용화사는 원래 낙동강을 발밑에 두고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낙동강과 인접한 강변 사찰로 쉬 잊혀지지 않는 풍광을 자랑했다. 그러나 절과 물 사이로 기찻길이 들어서면서 사세가 급격하게 쇠락했다. 대웅전과 요사 2채가 절이 가진 건물의 전부다. 거의 10분마다 한 대씩 지나는 열차의 굉음이 따귀가 되어 날아왔다.

 <사진> 용화사 앞쪽을 지나는 열차.


철로만 놓였어도 풍경이 그다지 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철길과 같은 길이를 가진 철제 펜스가 용화사의 눈을 싸매버렸다. 용화사 앞마당에 더 이상 낙동강은 없다. 그래도 산길을 오르면 숨겨졌던 강의 몸이 서서히 드러난다. 처음엔 오봉산 중턱에 있는 가람사가 용화사인 줄 알았다. 규모가 크고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지만 지난해 신축된 절이다. 남루한 풍경에 용화라는 이름이 겹치면 더 얄궂다. 용화(龍華)는 미륵부처님이 주재하는 세계를 말한다. 보물 제491호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미륵님이라고 부른다.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는 곳, 욕망이 슬프지 않고 희망이 우습지 않은 곳이다. 불법(佛法)이 단순히 마음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펄펄 살아 숨쉬는 나라다.

유명론(唯名論)은 보편적 관념을 인정하지 않는 유럽 중세의 이단적 사조였다. 신권(神權)이 지배했던 당시는 실재론이 대세였다. 실재론자들은 모든 사물은 신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며 모든 사물을 포섭하는 존재론적.윤리적 이상(이데아, Idea)이 있다고 믿었다. 반면 유명론자들은 보편적 관념이란 사람들이 가져다 붙인 한낱 ‘이름’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오직 개체만 있을 뿐 보편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데아를 부정했다.

윌리엄 오컴(1285?~1349)은 대표적인 유명론자였다.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경제성의 원리를 가리키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란 개념 역시 그에게서 따왔다. 요지는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쓸데없이 논리를 추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유를 복잡하게 해 오판의 가능성을 높이는 불필요한 가정은 면도날로 잘라내 버리라는 것이다. ‘사고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리는 그의 명제는 현대에도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적 지침으로 존중받고 있다.

철길에 갈린 용화사의 운명을 보며 뜬금없이 떠오른 단상이다. 길은 사람과 사람, 돈과 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길 위를 걷는 수레엔 금붙이와 함께 책도 실렸다. 길이 많아질수록 물자와 사상의 유통은 활발했고 길을 많이 가진 나라일수록 크게 자랐다. 사람들은 길이 많아지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길이 넘쳐나는 세상은 그저 복잡해질 뿐이었다. 사통팔달이 이뤄져도 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쪽에 길을 내면 저쪽이 울었고 저쪽에도 길을 내주면 이쪽이 갑자기 울었다.

길이 많아지자 답도 많아졌다. 길들은 자기의 길이 정도(正道)라며 서로 충돌했다. ‘차라리 내 몸이나 홅고 지나가던 시절이 낫지 않았을까.’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낙동강의 외줄기가 심각하게 묻고 있었다. 오봉산에도 구렁이 같은 길들이 있었다. 어디로 가든 몸을 누일 곳은 있을 것이다. 눈치 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한 길만 가면 된다. 고독하되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양산=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53호/ 8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