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저런얘기

영주 희방사의 기차역

 

영주 희방사의 기차역

 

 

 

전통과 현대가 어울린 그곳…이젠 풍경이 되다

 

사찰에서 이름을 따온 역은 모두 9곳이다. 논산의 개태사역, 사천의 다솔사역, 의정부의 망월사역, 장성의 백양사역, 경주의 불국사역, 창원의 성주사역, 김천의 직지사역, 여수의 흥국사역, 영주의 희방사역. 전국에 골고루 분포됐다. 교회나 성당에서 명칭을 빌려온 역은 없다. 사찰의 오랜 역사성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기차가 현대의 상징이라면 사찰은 전통의 징표다.

기차역 사찰은 현대와 전통이 뒤섞인 지점이다. 전통은 현대에 십중팔구 굴복하기 마련이지만 여기선 전통이 현대를 밀어냈다. 그러나 승리의 결과는 우울하다. 오늘날 역에는 열차가 서지 않거나 거의 안 선다. 도로의 발달로 구태여 철로에 기댈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청량리발 오전 7시 무궁화호. 서울에서 희방사역으로 가는 첫차다. 두 번째 차는 2시간 뒤에 떠난다. 두 번째 차가 막차다. 이용승객은 1주일에 너덧 명이 고작이다. 이조차 주말에 몰려 있다. 평일의 역사(驛舍)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롭다. 가장 오래되고 가난한 열차가 아주 가끔 지나는 곳이다. 희방사역의 철길은 이제 수송이 아니라 풍경으로만 기능한다.

철도는 근대의 산물이다.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 발명한 증기기관차와 함께 세계사에 첫발을 디뎠다. 평지에 철근과 나무를 격자로 엮어 도로를 낸다는 생각은 어쩌면 비효율적인 발상이다. 궤도를 이탈해선 안 되는 좁고 빡빡한 길이었다. 그러나 아스팔트 포장능력을 깨우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은 최선의 인공(人工)이었다. 차량을 길게 이어 붙이면서 가로가 지닌 공간적 약점을 극복했다. 무엇보다 철도가 교통수단의 일대 혁신으로 부상한 계기는 속도 때문이다.

1825년 9월 스티븐슨이 제작한 증기기관차 ‘로커모션(Locomotion)’의 속도는 시속 16킬로미터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그것은 쾌속으로 읽혔다. 더욱이 90톤에 달하는 객화차를 끌고 달린 개가였다. 자본과 기술은 인력과 물자를 보다 많이 보다 멀리 보다 빠르게 운반할 수 있는 신문물의 가능성을 직감했다. 로커모션이 시험운행된 바로 다음 달에 철도영업이 개시됐다. 산업혁명과 제국주의가 동승하면서 철도는 무적이 됐다. 미국은 1828년 첫 철도에 이어 1869년 대륙횡단 철도를 완성했다. 철도의 총 길이는 3만5000킬로미터이며 철도회사의 숫자는 700개가 넘는다. 그들은 철도를 지배하면서 세계를 지배했다. 요즘은 철도의 위신이 말이 아니다. 느리고 자주 늦는다. 비행기와 자동차가 교통의 주류로 부상한 탓이다.

우리나라 철도의 시작은 경인선이 개통된 1899년이다. 서양의 철도가 그들의 앞선 근대를 선두에서 이끈 이기(利器)였다면, 우리의 철도는 뒤늦은 혹은 때늦은 근대에 딸려 들어온 이기(異器)였다. ‘화륜거(火輪車)의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1899년 9월19일자 독립신문).’ 주미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은 1889년 철도 모형을 가지고 귀국했다. 그가 철도부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후 민족자본에 의한 자발적인 철도건설이 시도됐다. 아쉽게도 자금난에 부딪혔고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에게 매도했다. 모스 역시 돈을 대는데 실패했고 그는 일본 정부에 부설권을 팔아넘겼다. 일본은 기어이 철도건설에 성공했다. 경인선은 그들에게 정한(征韓)의 시작이었다.

나라의 명운엔 아랑곳없이 철도는 나날이 발전했다. 그것은 귀향과 여행의 길이 되기도 했고 수탈과 징용의 길이 되기도 했다. 도시의 입구에선 직선으로 뻗었고 시골을 만나면 곡선으로 굽으며 목숨을 이었다. 100년간 이런저런 사연과 의미를 태워 산하 곳곳에 내려다주었다. 돈만 주면 어디든 데려다주었다. 손님의 선악을 묻지 않았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3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기차역 사찰들은

초파일만 되면 사찰에 참배하러 가는 불자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각자 살림을 꾸리다

1970년을 기점으로 기세가 꺾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970년이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시기다.

육상교통의 주역이 철도에서 고속도로로 교체되면서

변방의 철길들은 할 일을 잃었다.

문명이 철수한 자리를 절이 지키고 있었다. 역에서 동북쪽으로 난 비탈길을 4킬로미터 정도 오르면 희방사를 만난다. 소백산 기슭 해발 850미터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두운대사가 창건했다. 창건설화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두운스님이 산길을 가는데 신음하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호랑이는 마을의 아낙을 잡아먹었다가 목에 비녀가 걸려 괴로워하고 있었다. 스님이 비녀를 빼주고 살려줬다. 호랑이는 사례하겠다는 생각에 양가집 규수 하나를 물어다 바쳤다. 그녀는 경주 호장(戶長, 지방 향리의 우두머리)의 외동딸이었다. 스님은 호랑이를 타박하며 그녀를 온전히 귀가시켰다. 호장은 딸을 살려준 스님을 위해 절을 지어주었다. 절의 이름은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자와 스님의 선방임을 의미하는 방(方)자를 썼다.

절은 장중한 시간에 비해 협소한 공간을 가졌다. 희방사는 본래 <월인석보(月印釋譜)> 1.2권의 판목을 소장한 절로 유명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해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한글대장경이다.

판목은 한국전쟁으로 대웅전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법당은 다시 세웠지만 판목은 되찾지 못했다. 녹음이 불붙은 소백산은 희방사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철길과 절길 사이엔 물길이 쏟아져 내린다. 높이 28미터로 내륙 폭포 가운데 최고(最高)인 희방폭포다. 자연은 문명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마음껏 발산했다.

희방사역은 1942년 4월1일 간이역으로 개통됐다. 1946년 무장공비의 내습으로 사라졌다. 신축된 역은 1951년 4월11일 보통역으로 승격됐다. 나이로 따지면 백양사역이 가장 고참이다. 1919년에 섰다. 성주사역과 흥국사역은 1960년대 창원과 여수에 공단이 개발되면서 등장했다. 막내는 망월사역(1986년)이다. 맨 나중에 출발했지만 위력은 그나마 제일 센 편이다. 수도권에 자리한 장점 때문이다. 주말이면 전철을 타고 도봉산을 향하는 등산객들 덕분에 겨우 밥값을 하고 산다.

3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기차역 사찰들은 초파일만 되면 사찰에 참배하러 가는 불자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각자 살림을 꾸리다 1970년을 기점으로 기세가 꺾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970년이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시기다. 육상교통의 주역이 철도에서 고속도로로 교체되면서 변방의 철길들은 할 일을 잃었다. 도로의 확충은 자가용의 증가로 연결됐다. 철길은 아스팔트길의 넉넉한 공간성과 승차감을 당해내기 버거웠다.

철도는 산업화의 첨병이었다. 전화가 무형적 문명을 개척할 때 철도는 유형적 문명의 서막을 열었다. 자본과 기술은 철길을 타고 전국 각지에 흩어진 빈곤과 미개를 치유했다. 그러나 소유와 분배의 문제에 대해선 괘념치 않았다. 그냥 냅다 달릴 뿐이었고 초연한 저돌성으로 근대를 완성했다. 그리고 근대의 종결과 함께 보기 좋게 팽을 당했다.

근대가 자본의 축적에 열을 올렸다면 현대는 자본의 소비에 눈이 뒤집어졌다. 현대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정해진 장소에 내려야 하는 이동의 형식에 싫증을 냈다. 철도가 벌어다 준 돈으로 차를 사고 길을 닦았다. 철도의 흥행이 공동체의 균열을 촉발했다면 철도의 쇠락은 공동체의 상실과 맞물린다. 물론 자업자득이요 인과응보다.

영주=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49호/ 8월9일자]

'이런저런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찾아도 제자리 못 가는 불교성보가 있다   (0) 2008.10.15
울산 동축사의 관일대  (0) 2008.10.14
대구 부인사의 포도밭   (0) 2008.10.09
부산 묘심사의 항구   (0) 2008.10.08
함양 벽송사의 미인송   (0) 2008.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