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저런얘기

울산 동축사의 관일대

 

울산 동축사의 관일대

 

 동축사 뒤편에 있는 관일대. 오른쪽 바위에 ‘扶桑曉彩’라는 글귀가 역순으로 새겨져 있다.  

                    

                                        

               
 석탑에 똬리 튼 3만7천근 ‘신라의 꿈’

                         

울산은 신라의 대표적인 외항이었다. 객지에서의 죽음으로 아내를 망부석으로 만들어버린 충신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나던 율포가 있고, 아내와 간통하던 역신을 춤으로 쫓아낸 처용설화의 무대가 된 개운포가 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코쟁이였던 외모로 보아 처용이 서역 출신이었으리란 건 이미 오래된 짐작이다. 신라인들은 울산을 통해 태평양과 만났다. 동해의 일출을 맨 먼저 발견하는 포구에서 시작하는 바닷길은 인도까지 촉수를 대고 있었다.

동축사는 울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찰이다. 동축이란 동쪽의 천축(天竺), 곧 동인도를 뜻한다. 동축사는 인도 아육왕(阿育王, 아쇼카왕)의 꿈을 신라 진흥왕이 대신 실현해준 절이다. 절은 마골산(麻骨山)에 안겼다. 삼베와 색깔이 비슷한 허연 바위들이 군데군데 맨몸을 드러냈다. 산의 고도는 297미터에 불과하지만 시야가 트여 일출을 감상하기 좋다.

동축사 위쪽 관일대(觀日臺)에 서면 마골산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먼 시선으로는 현대중공업의 일터까지 붙잡힌다. 관일대는 바위가 무더기를 이뤘다. 오른쪽 가장 큰 바위에 ‘扶桑曉彩(부상효채)’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남목(南牧)을 다스렸던 감목관 원유영(元有永)의 작품이다. 정자체로 글씨의 힘이 좋고 뚜렷하다. ‘해뜨는 동쪽바다에서 아름다운 빛을 내는 신성한 나무’라는 의미다. 동축사 주변엔 소나무가 많다. 진흥왕 시대 동축사에서 발한 빛이, 서축에서 오는 아육왕의 불상을 인도한다는 상징으로도 읽힌다.

아육왕은 인도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임금이다. 불교의 세계화는 아육왕에게서 비롯됐다. 그는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교단을 전폭적으로 배려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다. 불살생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불법(佛法)이 가르치는 화합은 복잡다단한 민족들이 부대끼는 국토를 다스리는 데 매우 적절한 이데올로기였다. 부처님의 육성을 경전으로 결집한 것도 아육왕의 지원 덕분이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왕위를 이은 진흥왕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삼국통일의 물꼬를 텄다. 그는 군왕이었고 당연히 국력의 극대화를 꿈꿨다. 동축사에는 절 안에 인도 전체를 옮겨다 놓고 싶었던 진흥왕의 야망이 젖어 있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장육조(黃龍寺丈六條)’ 편에 동축사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괄목할 만한 제왕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만큼 절의 유래에 관한 신화는 거대하다. 절이 받은 몸도, 몸을 받기 위해 기다린 시간도 비할 바 없이 육중했다.

“신라 진흥왕이 즉위한 지 14년 그러니까 계유년(553) 2월의 일이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紫宮)을 신축하려는데 황룡(黃龍)이 나타났다. 조정은 궁궐을 지으려던 계획을 접고 불사에 돌입했다. 절의 이름은 황룡사라 했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 얼마 후 바다 남쪽에 커다란 배 한 척이 하곡현의 사포에 정박했다(사포는 지금의 울주군 곡포를 말한다). 선박 내부의 쪽지에 적혀 있기를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분(分)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낸다.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丈六尊像)으로 태어나기를 축원한다.’ 현의 관리가 왕에게 샅샅이 보고했다. 왕은 사람을 시켜 현의 동쪽 부근 명당을 잡아 동축사를 창건하고 삼존불을 안치했다.

금과 철을 서울로 수송해 갑오년(574) 3월 장육존상을 만들어냈다. 무게가 3만7000근이었고, 들어간 황금이 1만190분이었으며, 두 보살상에 들어간 철이 1만2000근, 황금이 1만136분이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잘 모셨다.”

<사진설명>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축사 삼층석탑.

동축사가 황룡사에 봉안된 본존불 1기와 협시보살 2기를 조성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장육은 16자의 높이를 가리킨다. 5미터로 환산되며 이 높이부터 대불(大佛)로 대접한다. 3만7000근이면 2.2톤이다. 신라인들이 품었던 꿈의 무게다.

황룡사는 잊혀진 극락이다. 장육존상은 9층 목탑과 함께 황룡사를 대표하는 양대 성보였다. 643년 9층 목탑을 조성하면서 황룡사 불사는 90년 만에 완료됐다. 황룡사는 불국토라는 사상적 이상과 삼국통일이라는 정치적 이상을 극강의 규모와 미학으로 형상화한 공간이었다. 13세기 몽골군의 방화로 불타 없어졌지만 흔적만으로도 압도적이다. 38만 제곱미터, 곧 11만5000평의 늪지에 중문.목탑.금당.강당을 남북으로 길게 배치했다. 9층 목탑의 높이는 82미터였다. 자본과 기술이 차고 넘치는 오늘날에도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하는 대작불사였던 셈이다. 물론 불교가 국교였고 부처님 외에 다른 신성을 불허하는 체제였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불사다. 진흥왕은 부처님의 자비보다 신력에 관심을 뒀다.

 

황룡사는 사라졌고 동축사는 예전만 못하다.

대웅보전 앞에 높인 삼층석탑은 고려 중기의 작품이다.

기법이 투박하고 옹색하다.

그나마 오랜 옛날 기단을 도둑맞았다.

시멘트로 새로 만든 기단 위에 얹힌 석탑은 이물스럽다.

근본을 상실한 석탑에는 형상에 집착하는 자들의 씁쓸한 말로가 겹친다.



황룡사 불사가 착수된 553년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온 해와 일치한다.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함께 551년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빼앗았다. 나제동맹은 본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시작된 433년에 성립됐다. 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했던 동북아의 패자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결합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공동으로 탈환한 한강 유역을 제 땅으로 삼으면서 나제동맹은 120년 만에 깨졌다. 분노한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와 결전을 벌였지만 외려 전사하고 말았다. 한강이 지닌 물과 농토는 한반도의 패권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길지였다. 553년의 배신은 이후 신라의 승승장구와 백제의 끝 모를 추락을 갈라놓는 이정표였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나중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차돈이라는 최초의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였다. 늦고 어렵게 얻은 신앙이었던 만큼 믿음은 강력했고 기대는 절실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계속된다. 신라인들의 선민의식을 엿볼 수 있는 서술이다. “아육왕은 서천축국 대향화국(大香華國)에 사시던 분이다. 부처님이 나신 지 1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진신(眞身)에게 공양을 바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불상을 만들려 했으나 세 번이나 실패했다. 그때 태자가 불사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자 왕이 나무랐다. 그러나 태자는 ‘힘만으로는 공덕을 이룰 수 없다’며 ‘일찌감치 잘 안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설득당한 왕은 금과 철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남염부제의 16곳, 큰 나라 500곳, 중간 크기의 나라 1만 곳, 작은 나라 8만 곳을 돌았음에도 불사를 이뤄줄 귀인을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만들어냈다. 불상이 완성됐고 부처님의 얼굴 윤곽이 빠짐없이 갖춰졌다.

아육은 번역하면 ‘근심이 없다(無憂)’는 뜻이다.” 장육존상이 만국 가운데 오로지 신라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쾌거임을 시사한다. 아무데서도 이뤄지지 않은 일이 신라에서 이뤄졌고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진흥왕이 해냈다. 비할 바 없이 귀하고 중한 인연이었지만 천명은 특혜를 부여하지 않았다. 황룡사는 사라졌고 동축사는 예전만 못하다. 대웅보전 앞에 높인 삼층석탑은 고려 중기의 작품이다. 기법이 투박하고 옹색하다. 그나마 오랜 옛날 기단을 도둑맞았다. 시멘트로 새로 만든 기단 위에 얹힌 석탑은 이물스럽다. ‘근본’을 상실한 석탑에는 형상에 집착하는 자들의 씁쓸한 말로가 겹친다.

울산=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51호/ 8월16일자]

'이런저런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산 용화사의 낙동강   (0) 2008.10.16
찾아도 제자리 못 가는 불교성보가 있다   (0) 2008.10.15
영주 희방사의 기차역  (0) 2008.10.10
대구 부인사의 포도밭   (0) 2008.10.09
부산 묘심사의 항구   (0) 2008.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