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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곡성 태안사의 능파각

 

곡성 태안사의 능파각

 

 <사진>  태안사 입구에 자리한 시도유형문화재 제82호(전남) 능파각. 




  종교 풍취 없는 그곳서 피안을 만나다




‘춘향가’를 보면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수하들을 이끌고 남원 관아를 기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곡성(谷城) 군수는 때 아닌 난리에 정신 줄을 놓고 도망한다. 이 대목에서 그의 애끓는 심정을 희화화하기 위해 곡성(哭聲)이란 표현을 썼다.

 ‘哭聲’은 실제로 통용되던 곡성의 별명이다. 고려시대 전국의 장터를 전전하던 장돌뱅이들이 유독 교통이 불편했던 곡성을 탓하며 이렇게 바꿔 불렀다. 이후 곡성(穀城)이라고도 했는데 곡식이 많이 나는 고장이란 뜻이다. 얼핏 영예로운 이름이지만 실속은 없었다. 되레 국가가 조세만 과중하게 지울 빌미만 제공했다.

주민들의 원성에 지명은 현재의 곡성(谷城)으로 굳어졌다. 골짜기 마을이란 이름답게 물이 지천으로 흐르는 동네다. 54㎞에 이르는 섬진강과 보성강을 기반으로 자라났다. 보성강과 섬진강이 합류하는 압록유원지는 맑은 수질과 넓은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1급수에서만 사는 은어와 참게, 쏘가리가 잡힌다. 압록유원지 위로 전라선 철교와 반월교가 가로지른다.

‘다리(橋)’는 ‘다리(脚)’의 연장(延長)이다. 길짐승이 맨몸으로 건널 수 없는 길을 맨몸으로 건너게 해준다. 교량의 순우리말이 왜 다리가 됐는지 쉽게 이해가 간다. 다리는 강과 바다, 계곡과 절벽을 가로지르며 이곳과 저곳의 소통을 가로막는 악을 해소한다. 물론 악을 무사히 건너낸 세상에 반드시 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퐁네프의 다리는 사랑을 위한 다리였으나 콰이강의 다리는 침략을 위한 다리였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삶이 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생(生)과 사(死)가 뱉어놓은 찌꺼기에만 반응하고 연연한다. 뭍과 뭍을 연결할 때에도 거래를 틀 때에도 다리를 놔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부처님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다리를 놔준 분이다. 났으면 죽어야 하고, 죽었으면 나야 한다는 깨달음은 세상을 좀더 수월하게 건너게 해준다. 극락교 해탈교 … 산사에 다리가 많은 이유는 단지 물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만은 아니다.

태안사에도 다리가 많다.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면 돌아가라는 ‘귀래교(歸來橋)’, 마음을 씻으라는 ‘정심교(淨心橋)’, 깨달음을 얻으라는 ‘반야교(般若橋)’, 깨달음을 얻었다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던지라는 ‘해탈교(解脫橋)’가 줄을 잇는다. 다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마음을 비우란다.

태안사 계곡 위에 놓인 능파각(凌波閣)은 절로 들어가는 마지막 다리다. 시도유형문화재(전남) 제82호다. 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스님(慧哲)이 만들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스님(廣慈)이 수리했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복원했다. 6.25 사변 당시 일주문과 함께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전각이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옆면 3칸의 규모로 단출한 편이다. 지붕 옆면은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간결한 맞배지붕 형식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해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그루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되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사용했다.

 

‘능파(凌波)’란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한다.

외려 끝물엔 종교적 풍취가 말끔하게 탈색됐다.

어쩌면 깨달음의 결과를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낱말일 것이다.

육조 혜능 선사는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했고

청허휴정 선사는

“바른 법을 구하겠다는 생각은 망상(求正法是邪)”이라고 했다.

그들에겐 이런저런 생각을 한꺼번에 놓아버린 자리가 바로 부처의 나라였다.



능파각은 교량이면서 정자다. 계곡을 건널 수도 즐길 수도 있는 공간이다. 청정한 도량으로 들어서는 최종 관문이었기에 이름 역시 가장 신성하고 정결한 무엇일 것이라 예상했다. ‘능파(凌波)’란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한다. 외려 끝물엔 종교적 풍취가 말끔하게 탈색됐다. 어쩌면 깨달음의 결과를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낱말일 것이다. 육조 혜능 선사는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했고 청허휴정 선사는 “바른 법을 구하겠다는 생각은 망상(求正法是邪)”이라고 했다. 그들에겐 이런저런 생각을 한꺼번에 놓아버린 자리가 바로 부처의 나라였다.

주지채로 쓰는 염화실에 앉으면 동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태안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창지다. 서기 839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체공혜철(體空慧哲, 785~861) 선사는 태안사에 여장을 풀었다. 문성왕이 정책 자문을 구할 만큼 위신이 높았던 고승이었다. 절 안엔 스님을 기리는 부도가 지금껏 남아 있다.

<사진> 염화실에서 바라본 동리산.

보물 제273호인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이다. 태안사(泰安寺)는 대안사로 불렸었다. 풍수지리학의 시조인 도선(道詵, 827~898) 국사의 스승이다. 광자(廣慈)는 법신윤다(法信允多, 864~945) 선사의 시호다. 도선과 함께 혜철의 법을 계승한 ‘○여(○如, 정확한 법명은 알 수 없다)’의 제자였다.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참정(參政)을 권유받았으나 “도(道)는 몸 밖에 있지 않고 불(佛)은 마음속에 있다”며 거절했다. 태안사 부도밭엔 윤다의 부도도 스승의 것과 함께 놓여 있다.

조주석교(趙州石橋)의 일화는 다리를 통해 선(禪)이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문 : 오랫동안 돌다리를 그리워했습니다만 막상 와서 보니 그저 통나무다리만 보일 뿐입니다. 답 : 너는 다만 통나무다리를 보았을 뿐, 아직도 조주의 돌다리는 못 보았구나. 문 : 그 조주석교란 무엇입니까. 답 : 당나귀도 건네주고 말도 건네준다.’

조주종심(趙州從, 778~897) 스님은 당대 최고의 명안종사(明眼宗師)였다. <벽암록>에 전하는 100개의 화두 중 12개가 선사의 것일 만큼 선종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평소 선사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던 학인 하나가 선사를 친견했다. 그러나 학인이 본 조주 선사는 볼품없는 노인의 행색에 불과했다. 결국 통나무다리에 빗대 은근히 선사를 조롱한 것이다. 학인의 불손한 공격에 조주 선사는 눈 한번 끔뻑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네는 통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조주의 돌다리는 보지 못했다며 외양에만 집착하는 학인의 중생심을 타일렀다. 조주의 돌다리, 곧 당신의 진면목은 당나귀도 말도 건네준다는 데 있다. 일체 중생을 차별 없이 부처로 섬기며 그들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주고 있다는 의미다.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한다(泥佛不渡水 金佛不渡爐 木佛不渡火).’ 조주 선사는 ‘마음 부처(心佛)’만이 현상적 장애로부터 자유롭다고 역설했다.

무애(無碍)를 즐기는 선지식에겐 불법(佛法)조차 구속이다. 깨달은 자는 깨달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바람처럼 걸어갈 것. 물 위에 세운 집이자 지붕이 있는 다리에 슬며시 발을 얹어봤다. 별다른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저 목재를 밟는 느낌이다. 다만 발밑이 미세하게 꺼지는 듯한 포근함이 있었다. 삶의 무게가 이 정도라면 살 만할 것이라 생각했다.

곡성=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59호/ 9월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