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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정각스님 ‘1900년대 서화첩 원본’ 공개

 

정각스님 ‘1900년대 서화첩 원본’ 공개

영남 10여개사찰 직인 담겨

 

 사진 왼쪽부터 불법승 삼보인. 석굴암. 쌍계사. 범어사. 용화사. 불국사. 통도사. 내원암 직인  


일제강점기 구하(九河,1872~1965)스님의 인보(印譜)와 영남지역 사찰 직인(職印)이 담긴 서화첩(書畵帖)이 공개됐다. 고양 원각사 주지 정각스님은 지난 2월28일 불교신문을 통해 1915년 제작된 서화첩 원본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서화첩에는 구하스님이 사용했던 여러 종류의 도장이 찍힌 인보와 불국사.통도사.해인사.쌍계사.범어사 등 영남지역 10여개 사찰 직인(職印)이 참배기념 스탬프와 함께 실려있다. 가로 8.8cm 세로 16cm 크기의 서화첩에는 모두 5편의 시문(詩文)도 실려 있다. 시문 가운데는 구하스님 친필도 들어있다.

서화첩의 주인공은 ‘해천월영(海川月泳)’이란 인물로 한국스님 또는 일본인일 가능성이 있다. ‘嶺南巡禮記念 乙卯 六月二十二日 七月二十五日(영남순례기념 을묘6월22일 7월25일)’이란 기록으로 보아 1915년 6월22일부터 7월25일까지 34일간 영남지역 사찰을 순례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순례를 하면서 해당 사찰에 주석하는 스님들의 친필 또는 직인과 스탬프 등을 받아 제작한 서화첩이다.

1915년 34일간 지역사찰순례 기념해 제작

통도사.불국사 등 확인…소중한 사료될 듯

구하스님 친필 적힌 5편 詩文도 함께 실려


서화첩에 수록된 통도사.불국사.석굴암.범어사.내원암.쌍계사.동국제일선원.용화사 등의 사찰 직인은 근대불교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정사각형 안에 ‘佛法僧寶(불법승보)’라고 새긴 삼보인(三寶印)도 눈길을 끈다.

서화첩에 실려있는 ‘참배기념 스탬프’는 사찰마다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동그란 모양의 석굴암 스탬프는 본존불과 금강역사 주위로 ‘신라고적석굴암’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본존불만 묘사한 스탬프도 함께 사용됐다. 통도사는 커다란 원과 작은 원 사이에 화려한 물결 모양이 있으며, 위에는 삼보륜 원을, 아래에는 만자를 넣었다. 또한 대본산 통도사라는 글을 한문으로 써 넣어 불지종가임을 나타내고 있다.

범어사는 특별한 디자인 대신 삼법인을 나타내는 ‘점 세 개’가 양쪽에 있으며, 윗부분에는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 아랫부분에는 ‘梵魚寺 參拜紀念(범어사 참배기념)’이라고 되어 있다. 선찰대본산은 성월(惺月)스님이 1912년 승풍진작과 사중(寺中) 혁신 차원에서 붙인 명칭으로, 이번에 공개된 서화첩을 통해 재확인됐다. 해인사는 ◁ ▷ 라는 표시 사이에 세로로 八萬大藏經(팔만대장경)이란 글씨를 넣은 스탬프를 사용했다.

승가대학원장 지안스님은 “서화첩에 있는 ‘江南無所有 只贈一枝梅 鷲山書(강남무소유 지증일지엽 축산서’라는 글은 구하스님 친필이 맞다”면서 “통도사 참배를 온 ‘해천월영’에게 써 준 것”이라고 말했다. 지안스님은 “강남에는 아무 것도 없어 단지 매화를 줄 뿐”이라고 풀이했다.

불교중앙박물관장 범하스님은 “일제 당시 주로 일본인들이 사찰순례를 기념해 서화첩을 만든 경우가 있었다”면서 “해천월영이 일본인일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지안스님과 범하스님은 “100여년전 성지순례 모습과 당시 사찰 직인 및 스님들의 글씨를 만날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한편 서화첩을 공개한 정각스님은 “선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구하스님 친필과 인보가 있어 관심을 갖고 입수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정각스님은 “한국불교 근세자료가 모아지지 않고 흩어지는 경향이 있다”면서 “근세 고승들의 저술이나 출판물 등의 자료를 모아 한국불교를 원형대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 왼쪽 은 1915년 제작된 구하스님의 친필 글씨. ‘강남무소유 지증일엽’이라고 적혀있다.  오른쪽 사진은 고양 원각사 주지 정각스님이 지난 2월28일 공개한, 구하스님이 사용했던 인보들.


구하스님은 /

영축총림 통도사, 寺格 일신 활약

용성스님과 함께 불교운동 앞장도

성해(聖海)스님 상좌인 구하스님은 경봉(鏡峰)스님 사형이며, 월하(月下)스님 은사이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불교 정체성을 수호하고 영축총림 통도사의 기반을 구축한 선지식이다.

14년간 통도사 주지로 있으면서 사격(寺格)을 일신했다. 1906년 일본을 다녀온 스님은 용성스님과 함께 조선불교 개혁의 원력을 실천으로 옮겼다. 인재양성을 위해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마산.울산.진주.양산.창원.창녕 등에 포교당을 건립해 전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스님은 한동안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다. 1917년 친일승려 이회광, 강대련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고 <조선불교총보>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한 것이 빌미가 됐다. 그러나 최근 들어 비밀리에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돼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뤄지고 있다.

고양=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07호/ 3월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