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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단양 방곡사 11월에 ‘무문관’ 개원

 

단양 방곡사 11월에 ‘무문관’ 개원

수좌들이 일체 바깥출입을 금하고  수행에만 집중하는 무문관이 단양 방곡사에 개설된다. 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스님은 지난 11일 “오는 11월 동안거 결제에 맞춰 무문관을 개원할 예정”이라면서 “3년간 진행한 무문관 불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눈 밝은 납자들의 수행도량 될 것”

  화두참구 몰두하도록 최적의 환경 제공

  법납 10년 이상, 수좌 11명 방부 받아

방곡사 무문관은 33㎡(10평) 규모의 독립된 수행 공간 11채로 구성된다. 법납에 따라 무문관 수행처를 구별할 예정이다. 법납 20년 이상 수좌는 3채, 법납 15년 이상과 법납 10년 이상 수좌는 각각 4채의 수행처에서 정진하게 된다. 방이 한 건물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처를 각각 별도의 건물로 마련한 이유는 무엇일까.

묘허스님은 “아무래도 방이 붙어 있으면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서 “수좌들이 다른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방곡사는 보다 많은 수좌들이 정진하도록 무문관 방부기간을 9개월로 한정할 예정이다. 따라서 방부를 들이면 두 번의 안거와 한 번의 산철 정진을 할 수 있다. 다시 입방하려면 3개월이 지나야 가능하다.

방곡사 무문관 개원은 묘허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됐다. “평생 ‘부처님 밥’을 얻어먹고 살았으니, 여생은 수좌들의 정진을 돕고 싶다”는 묘허스님은 “대중들이 정진하는 일반선원은 많지만 무문관은 드물다”면서 무문관 개설의 원력을 세운 까닭을 설명했다. 또한 제방에서 정진하는 구참 수좌들도 숨은 공로자다. 안거를 마치고 방곡사를 찾아온 수좌마다 묘허스님에게 “산세가 좋고 공기 맑은 이곳에 선원이 개설되면 많은 납자들이 정진할 수 있을 것”이라며 무문관 운영을 권했다. 방곡사는 무문관 스님들을 외호하며 정진하는 수좌들을 위해 일반 선원도 함께 개설할 예정이다.

묘허스님은 “아직 선원 명칭을 확정하지 않았다”면서 “개원에 맞춰 선원 이름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스님은 “출가한 근본 목적이 깨달음 성취에 있으니, 무문관에서 용맹정진하여 생사해탈을 이루는 눈 밝은 납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묘허스님은 1957년 상주 남장사에서 화엄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성암스님에게 대교이력 및 ‘전등록’을 이수하고, 통도사 보광선원 수선안거 이래 11하안거를 성만하는 등 선교(禪敎)를 겸비했다.

무문관 개설을 계기로 방곡사는 선풍 진작과 중생 구제의 대원력을 실천할 수행 도량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무문관 유래와 역사

무문관(無門關)은 본래 남송(南宋)시대 무문혜개(無門慧開) 스님이 지은 책 이름이다. 깨달음의 경지인 무(無)를 표현하고, 무자(無字) 화두를 탐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지금은 수좌들이 바깥 출입을 금하고 수행에만 몰두하는 정진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단어만 살피면 ‘문이 없는(無門)’ 수행이지만 화두 참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근본적인 뜻이다. 치열한 정진으로 ‘무문’을 지나 ‘개문(開門)’의 경지에 도달해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원력이 숨어있다.

사실 문(門)의 ‘위치’를 어디로 하는냐에 따라 무문관의 범위와 종류는 달라질 수 있다. 동학사와 천장암에서 문을 폐(閉)하고 정진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경허스님, 오대산을 떠나지 않고 수십년 정진했던 한암스님, 10년간 팔공산을 나서지 않은 성철스님의 동구불출(洞口不出)도 무문관 수행이나 마찬가지다.

외부와 단절, 수행에만 전념

근래엔 65년 천축사서 개설

최근에는 대중과 격리된 공간에서 각자 방문을 닫아걸고 화두 참구에 전념하는 경우를 무문관 수행이라고 한다. 무문관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공양도 외호대중이 공양구(供養口)라는 작은 문을 통해 전달 받는다. 이때도 대화는 금지되며 불가피할 경우 필담(筆談)으로 소통이 이뤄진다. 일체 말을 않는 묵언(言)이 무문관 정진의 기본인 까닭이다. 이 같은 수행은 치열함에서 비롯됐다. ‘나’를 제외한 외부와의 소통을 모두 단절하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집중하는 방편이다.

지금과 같은 우리나라 무문관은 1965년 12월27일 낙성된 도봉산 천축사가 그 시초이다. 천축사 무문관은 “부처님처럼 6년간 정진할 수 있는 올바른 수도원을 세우고, 본분 납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사진> 방문을 닫아 걸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백담사 무금선원 무문관. 불교신문 자료사진

당시 3년 결사의 원력을 세운 제선(濟禪).홍근(鴻根,서암).혜원(慧元).정영.관응(觀應)스님 등 16명이 방부를 들였다. 이어 1968년 2월에는 당시 총무원장 경산(京山)스님이 무문관 정진에 동참했다. 1972년 4월28일 관응.석영(夕影).현구(玄球)스님이 6년 정진을, 지효(智曉)스님과 경산(京山)스님이 4년 정진을 회향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무불(無佛)스님과 원공(圓空)스님 등 5명의 스님이 제2차 방부를 들였으며, 무불.원공스님은 1978년 11월에 6년 정진을 마쳤다.

이밖에도 무문관이 개설된 도량으로는 제주 남국선원, 인제 백담사 무금선원, 경주 무일선원 등이 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393호/ 1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