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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우리 얼속에 사랑 깃든 남원 만복사지와 선국사

민초들의 나라사랑, 하늘과 소통하는 도량
만복사지. 매월당 김시습의 저술 ‘만복사저포기’의 고향이기도 하다.

무덥던 여름도 자연의 순리에 밀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무언가 그리움에 발길을 옮기게 된다. 천년의 그리움을 안고 우리 얼속에 사랑이라는 한맛을 우려낸 곳이 남원 만복사지와 선국사이다. 소설 속 등장무대가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여 더욱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곳이 남원이다. 남원에는 죽은 자와 산자의 사흘간의 사랑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죽음을 무릅쓴 사랑 ‘춘향전’, 죽음으로써 지킨 나라사랑 ‘만인의총’ 등등 남원은 온통 사랑 이야기뿐이다.

➲ 만복사에서 시작되는 남원의 사랑

남원의 사랑은 만복사에서부터 시작됐다.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했던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 매월당 김시습은 세상에 맞추어 살아갈 수도 없는 자신을 만복사 부처님과의 한판 승부로 울분을 달래고자 하였던 것일까? 현실이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명산을 두루 편력하는 방랑자로 만들었고 응어리진 한을 발산하는 신화가 되어 만복사 빈 뜰에 내려앉아 저승의 사랑을 이승에 옮겨 놓았다.

만복사저포기 줄거리를 살펴보면, 만복사에 살고 있었던 총각 양생이 배필을 얻고자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했다. “만약 제가 지면 법연을 차려서 치성을 드리고, 만약 부처님께서 지시면 아름다운 낭자를 구해주소서.” 축원을 마치고 나서 저포를 던지니, 소원대로 양생이 이겼다. 계율에 “저포 등 온갖 유희를 하지도 말라”고 했는데 부처님과 내기를 하면 중생이 이기게끔 되어 있다. 불교는 신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양생은 천생연분낭자를 만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사랑을 하게 되지만 결국 양생의 천도에 의해 낭자는 다른 나라 남자로 태어나고 양생은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김시습은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과 낭자의 애틋한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만복사에 향 올리고 돌아오던 길이던가. 가만히 저포를 던지니 그 소원을 누가 맺어 주었나. 꽃 피는 봄날 이 밤이 어인 밤이기에 이처럼 고운 선녀를 만났던가. 꽃 같은 얼굴은 어이 그리도 고운지 붉은 입술은 앵두 같아라.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배필이 되어 꽃 피고 달 밝은 아래에서 끊임없이 노닐려오.” 귀신과의 사랑이 이렇게 구구절절 가슴 아린데, 산사람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
 

선국사 대웅전 대들보와 충량의 용.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것 같다.

➲ ‘만복사저포기’ 집필 당시 만복사…

김시습이 만복사저포기를 쓸 당시 만복사는 동쪽에 오층 전각, 서쪽에 이층전각이 있었으며, 전각 안에는 양생과 낭자가 배필을 얻기 위해 빌었던 철 부처님이 길이 35척, 무게 1만3000근이었다고 한다. 또한 김종직이 쓴 ‘남원 만복사’란 시에서 “일천 집 바람 연기 자욱한 옛 고룡(남원)에 구름 위에 솟은 큰절 단청도 아름다워라”고 했으니 만복사 5층 전각은 구름에 가릴 만큼 높고 단청은 극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그 컸던 가람은 잿더미가 되었고 석조물만 남아 있다. 연등을 들고 밤늦도록 탑돌이를 한 오층석탑과 부처님이 앉으셨던 깨어진 석조대좌는 양생과 여인의 소원이 들리는 듯 온기가 느껴진다. 또한 동쪽 보호각에 서 계신 돌부처님은 만복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셨으리라.

특히 입구 남쪽에 서 있는 금강역사는 3.7m(전체 5.5m)의 큰 키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조형미는 위엄이 느껴진다. 90도 뒤틀린 얼굴, 휘어진 허리, 부리부리한 눈, 튀어나온 광대뼈, 꽉 다문 입술, 특히 양손은 당간을 잡는 모습은 간대를 고정하는 구멍이 뚫려있어 당간지주로 조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복사저포기에서 흥보전, 춘향가, 변강쇠전으로 이어지는 남원의 천년사랑은 위험이 닥치면 똘똘 뭉쳐 나라를 지키려 했던 민초들의 나라사랑이 가슴을 여미게 한다. 1597년 추석 전후 3일에 걸친 정유재란 남원읍성 전투에서 왜적 5만6000명에 죽음으로 대항한 1만여 명의 나라사랑 역사적 현장이 만인의총이다. 전투는 원래 교룡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치고자 했으나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남원읍성으로 군을 옮기라 명하여 결국 1만여 명을 죽게 했다.
 

만인의총. 1597년 추석 전후 3일에 걸친 정유재란 남원읍성 전투에서 왜적 5만6000명에 죽음으로 대항한 1만여 명의 나라사랑 마음이 서려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 교룡산성 처영대사 그리고 선국사

교룡산성은 산세가 삐죽삐죽 굴곡져 어디서든 엄폐가 가능한 천혜의 요새로 총 둘레가 3.1km의 규모이다. 의승장 뇌묵당 처영대사는 호남지역에서 1000여 명의 의승군을 조직하여 행주대첩에서 용맹을 떨친 스님이다. 처영대사는 권율장군의 지시로 의령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선국사에 주둔하며 7개월 만에 교룡산성을 수축했다. 상촌 신흠은 “처영 같은 대사야말로 모든 번뇌를 다 없애고 본성을 되찾고, 도의 작용을 일으켜 남을 돕는 그러한 스님이 아니겠는가”하여 전장을 누빈 처영대사의 보살도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교룡산성 내에 위치한 선국사는 군량미를 보관하는 사찰로 대웅전의 아미타부처님은 남원읍성 전투를 지켜보시며 호국영령들을 극락으로 이끌어 주신 부처님이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건칠아미타부처님은 높이 132.0cm, 무릎너비 93.0cm로 사각 얼굴에 풍부한 양감과 신체 비례가 알맞아 균형감이 있다. 계주와 백호와 검은 눈동자에 구슬을 감입하여 생동감을 주었으며, 귀와 손은 나무로 조각했다. 대웅전 대들보와 충량의 용은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고, 포벽에는 항마촉지인, 선정인, 설법인, 지권인을 한 부처님의 채색이 아름답다.
 

교룡산성. 산성 안에 선국사가 자리잡고 있다.

➲ ‘민족대표 33인’ 백용성스님 출가사찰

또한 선국사 은적암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머물며 동학의 교리 <동경대전>을 완성한 곳이며, 민족대표 33인으로 옥고를 치른 백용성스님이 14세에 출가한 사찰이기도 하다. 1894년 동학접주 김개남은 교룡산성에서 동학군 훈련과 작전을 한 곳으로 “부패한 지배 계층을 멸하고 왜적을 몰아내어 보국안민과 제세안민을 도모한다”는 동학농민혁명의 본거지로 삼기도 했다.

천년 사랑이 흐르는 만복사지, 만인의총, 선국사, 교룡산성 그리고 이도령이 춘향을 업고 놀던 광한루를 걸으며 의로운 이의 뜨거운 나라사랑을 가슴에 담아 봄직도 하다. 이승과 저승이 소통하고, 못난 사람과 잘난 사람이 소통하고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소통하며 민초들의 나라사랑이 하늘과 소통하는 남원의 만복사지와 선국사는 우리 얼 속에 사랑이라는 한맛을 우려내고 있다.

[불교신문3682호/2021년9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