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황전 좌측 길 오르면 부모에 대한
끝없는 효도를 상징하는 ‘효대’ 눈길
대나무 숲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108계단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부모님의 크신 은혜 느끼게 하기도…
4사자3층 석탑 떠받친 사자모습 보며
연기법사와 어머님 사연 새겨 보시길

삶의 고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라는 번뇌가 나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 먹으면 어느덧 나의 삶이 욕심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게 된다. 이럴 때 깊은 산속 꽃으로 장엄된 화엄사로 잠시 떠나 보면 어떨까?
화엄사는 신라 755년에 연기법사가 창건했고 이후 신라 말 도선국사가 출가하여 <화엄경>을 공부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는 주지 설홍스님 등 300여 승군이 구례의 길목 석주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모든 스님들이 장렬히 전사했고, 모든 전각이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벽암각성, 계파성능 등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 국보 5점, 보물 7점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화엄의 꽃을 피웠다.
➲ 지혜 寶庫 화엄경 모신 절
화엄사는 들어가는 일주문부터가 다르다. 담장이 둘러쳐지고 대문까지 있어 열고 닫음이 분명하다. 원래 일주문은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지만, 중생의 아픈 마음 달래기 위해서는 활짝 열려 있고, 관리들의 수탈과 외적의 침략을 막겠다는 승군 주둔사찰로는 닫힌 문이 되었다. 일주문 편액 ‘지리산 화엄사’는 1636년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광(珖)이 쓴 글씨로 ‘지혜가 뛰어난 산 속에 <화엄경>을 모신 절’이란 뜻이다.
1663년에 세운 벽암대사비에 보면, 영의정 이경석이 대사를 찬탄하길 “높은 행실은 부모께 효도함에 근원이 되었고, 속세를 버려 진면목을 얻었네. 지혜의 칼은 의심을 끊었고 깨달음의 터에서 인륜의 으뜸이 되어 자비의 배로 중생을 구제하고 보배로운 뗏목으로 나루를 건너게 하셨네” 했다.
대사는 팔도도총섭으로 오직 스님들의 힘으로 1624년 7월부터 1626년 12월까지 2년5개월 만에 남한산성을 쌓아 조선 인조왕은 교지와 가사를 하사했다. 또한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의승군 3000여 명으로 항마군을 조직해 남한산성으로 북진하려 했다. 대사는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다.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라는 세 개의 잠(箴)을 지어 스님들을 일깨웠다.

➲ 국보 대웅전과 보물 동·서 오층석탑
석축으로 둘러쳐진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보제루(普濟樓)가 나오는데, 내부는 시원하게 연등천장으로 꾸몄으며 대들보는 나무형태를 그대로 살려 아름답고 바닥은 마루를 깔아 널찍하다. 보제루 툇마루에 앉아 대웅전과 각황전을 바라보면 높이 4m, 길이 100m가 넘는 장대한 석축은 건물의 당당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마치 화엄경에 “미륵보살이 비로자나 장엄장 누각 문을 여니 넓고 크게 장엄함은 허공과 같고, 분명하게 나타나기는 그림자와 같아, 서로 사무쳐 비치되 장애가 되지도 않고 복잡하게 어지럽지도 아니하였다”고 했으니 바로 내가 장엄장 누각속의 선재동자처럼 느껴진다.
또한 동서로 우뚝 선 오층 불탑은 보물로 9세기경에 조성된 석탑이다. 동탑은 아무런 장식 없어 단정하고 늘씬한 반면 서탑은 불탑을 받들고 사리를 보호하는 상징성을 새겼는데 기단부 하단은 백성을 띠로 표현한 12동물이, 기단부 상단은 여래팔부중이, 초층 탑신에는 사천왕이 있다.
대웅전은 보물로 팔작지붕에 다포 형식으로 기둥이 높아 장중한 느낌을 주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1636년에 대웅전이 완공되니 의창군 광은 편액을 썼고, 인조는 ‘선종대가람’이란 교지를 내려 사격을 높였다. 내부에는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이 삼신불(三身佛)은 국보로 벽암대사가 주관하고 의창군 부부, 선조의 사위 신익성 부부 등 왕실과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1320명의 시주로 1635년 청헌 등 18명의 스님이 조성했다. 비로자나불은 일체 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법신(法身), 노사나불은 타 사찰에서는 뵐 수 없는 장엄된 몸으로 중생의 근기에 알맞게 양 손을 어깨 위까지 들어 올려 법을 설하는 보신(報身), 석가모니불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출현한 화신(化身)이다.

➲ 3불4보살…국보 각황전
국보 각황전(覺皇殿)은 화엄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건물로 본래 통일신라시대에 1장6척의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벽면에는 ‘화엄판석경’을 두른 ‘장육전(丈六殿)’이 있었던 곳이다. 왜란으로 소실되자 계파대사가 1699년부터 1702년까지 4년에 걸쳐 중층 건물로 다시 지어 ‘각황전’이란 편액을 달았다. 본래 ‘각황’은 석가모니불은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므로 ‘각행원만불(覺行圓滿佛)’이라는 뜻이다. 황제를 깨닫게 했다는 설화는 그만큼 불사가 어려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각황전은 팔작지붕, 다포 양식으로 내부는 위·아래가 트인 통층 구조로 매우 화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우에 다보불과 아미타불을, 그 사이에 문수, 보현, 지적, 관세음보살을 입상으로 1703년에 목조 3불4보살을 모셨다. 특별히 다보불과 지적(智積)보살을 모심으로써 ‘영산전’의 성격을 지녔다.
조성연기 발원문에 “석존의 묘법을 열어 근기에 맞게 세 차례 설법으로 중생을 일승으로 이끌게 하며, 다보불은 탑 속에서 진리를 증명하고, 서방 무량수불은 이 세계 사람을 가엾게 여긴다”고 했다. <법화경>으로 현세의 복을 구하고 사후에는 극락세계에 왕생코자하는 기원이 담겨있다. 다보불은 법화경을 증명한 부처님이고 지적보살은 부처님의 백억 가지 질문에 대답하여 지혜가 쌓여 ‘지적(智積)’이라 했다.
국보 35호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 국내 최고 국보 장명등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국보 장명등은 9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전체 높이 6.4m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석등으로 각황전과 잘 어울린다. 장명등은 지혜의 빛으로 일체를 비추어 중생의 어리석음을 지혜로 이끈 부처님의 다른 모습이다. 8각 바닥 돌 위의 엎어놓은 연꽃마다 신령스런 기운이 솟아나고 위에는 장명등이 떠 있음을 표현한 신령스런 구름이 넘실거린다. 그 위 장구형태의 간주석은 연화좌를 받치고 연화좌는 8각 화사석을 받들고 있다. 8각 지붕 모서리에는 신령스런 기운이 하늘로 솟구치고, 상륜은 불탑처럼 노반, 앙화, 보륜 보개, 용차, 보주 순으로 되어 있어 장명등이 곧 불탑과 같이 신성한 것임을 나타냈다.
각황전 좌측 길을 오르면 부모에 대한 끝없는 효도를 상징하는 효대(孝臺)가 있다. 대나무 숲속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108계단 한 걸음 한 걸음 부모님의 크신 은혜를 느끼게 한다. 효대의 4사자3층 불탑은 4마리 사자가 포효(咆哮)하고 연기법사의 어머님이 계시는 특이한 불탑이다. <경률이상> ‘축생부(畜生部)’에 “사자의 포효소리는 부처님의 말씀과 부모님의 은혜를 알리는 상징”이라 했다.
또한 불탑 앞 장명등은 연화좌 위의 우슬착지(右膝著地)한 연기법사가 왼손은 찻잔을 들고 머리에는 장명등을 이고 끝없이 공양 올리는 모습은 부모 자식 간 만겁의 인연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천 년 전 연기법사의 효심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불교신문3681호/2021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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