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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지금은 어느길을 가고있나?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이여

함부로 난잡하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그대가 걸어가는 이 발자국은

훗날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 서산 휴정스님


옛날 수많은 스님들께서는 부처님 성지인 천축국(인도)을 찾아 목숨을 건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혜초스님도 그렇게 하여 <왕오천축국전>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고, 어떤 스님은 천축까지 가서 나란다 대학에 입학해 수학을 했지만, 이미 나이가 들어 돌아오지 못한 채 하염없이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천축을 가보지도 못한 채 어느 사막위에 해골로 남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언젠가 광고에도 등장한 서산스님의 이 게송을 떠올리게 됩니다. 부처님을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 주는 이’라는 뜻으로 도사(導師)라고 합니다. 그러나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 줄 뿐 그곳에 이르는 것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길 위에 서 있으며, 어느 길을 향해 나가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근대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魯迅)은 ‘고향’이란 소설에서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올바르고 여법한 길을 향해

무소의 뿔처럼 가고 있는지

점검케 하는 울림이 아닌가

부처님께서는 길 위에서 태어나시어 팔십 평생을 그 길 위에서 함께 하시다가, 마침내 그 길 위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께서 위법망구하고 가시던 그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또 갈 따름입니다.

출가 전 대학시절에 가끔 긁적인 글을 모아 작은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석천세설>이란 제목 아래에 부제를 달고 미당 서정주 님의 싯구에서 따온 ‘글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어느 곳에도 없었다’는 글을 써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통도사 지형스님께 한권 드렸더니, 한 장도 넘겨보지 않은 채 “왜 길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길은 어느 곳에도 없다고 했습니까?” 물으셨습니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쩔쩔매다가 거꾸로 물었더니 “당신이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출가를 결심하고 스승이신 호진스님께 출가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번의 만남과 길에 대한 교훈으로 인해 마침내 덕숭산으로 출가를 하였으니, 길은 언제나 내게 희망이고, 화두이자 깨달음이 아니었나 합니다.

임제의현 선사께서는 “도를 배우는 이여, 부디 길과 원수 맺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길 위에 선채 어느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지, 어느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르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길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조고각하 한 채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르고 여법한 길을 향해 무소의 뿔처럼 가야할 길만을 고고(孤高)하게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 도전하며, 나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책상위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은, 누군가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어라!”

[불교신문 2745호/ 8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