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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기록으로 보는 한국불교 100년/ 일제강점기 설봉산 석왕사는…




일제강점기 설봉산 석왕사 대웅전 내부 모습. 석왕사 대웅전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기록으로 보는 한국불교100년 (3) 

한국전쟁시 소실된 대웅전 ‘생생’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설봉산 석왕사(釋王寺)의 53동에 이르는 전각 가운데 대부분이 사라졌다. 조선시대 손꼽히던 대찰(大刹)이었지만 동족상잔의 치열한 전투에 잿더미로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든 석왕사의 소실(燒失) 이전 사진을 만났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사진엽서에 들어있는 석왕사 대웅전 내부의 모습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으로 500여 년간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사찰임을 보여주듯 대웅전 내부는 웅장하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우편엽서에 수록된 이 사진에는 모두 일곱 분의 불보살상이 보인다.

부처님 뒤 후불탱화의 화려한 모습은 석왕사의 찬란한 역사를 증명한다. 1386년에 창건된 설봉산 석왕사는 1732년(영조 7년)에 대웅전과 영월루 등을 보완하여 고쳤다. 후불탱화의 봉안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진 속의 보존 상태로 보아 영조 당시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엽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불단 앞에 걸려 있는 장엄등이다. 대웅전 불단의 중심부에 있는 부처님의 좌우로 3개의 장엄등이 있다. 천정에 줄을 매어 등을 걸었다. 불단 위에 향로와 초 외에는 다른 장엄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장엄등은 평시에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전통등의 실체를 확인하는 자료가 드문 상황에서 사진 속 장엄등은 전통등 복원의 소중한 근거이다.

태조 이성계 이후의 왕들도 석왕사에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했다. 정조는 즉위 15년째인 1791년 4월17일(음) 어제비문(御製碑文)을 썼다. 함경감사 이문원에게 비문을 탁본하여 올리게 하여 직접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은 안변 설봉산에 있다. 태조가 왕업을 일으킬 조짐이 있는 꿈을 꾸고 토굴 속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에게 가서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다. 즉위한 뒤에 토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이라 했다. 태조가 소나무와 배나무를 손수 심었으며, 또 숙종과 영조 두 분의 어제비(御製碑)가 있다. 이때에 와서 상(정조를 지칭)이 그 곁에 비석을 세우고 어제의 글과 글씨를 돌에 새기게 하였다."

소실 이전의 석왕사 전경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고적도보> 사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진엽서처럼 석왕사 대웅전 내부 모습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희귀하다.

이밖에도 일본인들이 촬영해 발간한 엽서를 통해 석왕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발행된 석왕사 소재 사진엽서들에는 '朝鮮名所(조선명소)' '朝鮮風景(조선풍경)' '朝鮮京元線(조선경원선)' 등의 표기가 있다. 제작장소와 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690호/ 1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