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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기록으로 보는 한국불교 100년/ 100년 전 금강산 신계사

 
미국인 프레드릭이 1911년 촬영한 신계사 삼층석탑과 스님들. 출처=
 
 
100년 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新溪寺)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스님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특히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신계사를 묵묵히 지킨 대웅전 앞 3층 석탑은 어떤 모습일까. 깨지고 부서졌지만, 도량을 떠나지 않고 상처투성인 채로 신계사를 지킨 3층 석탑. 이 같은 궁금증을 단번에 풀어주는 사진이 확인됐다.
 
미국인 역사학자 프레드릭(Frederick Starr)이 1917년 발간한 에 실린 38장의 사찰 사진 가운데 신계사 3층 석탑이 있다. 한국전쟁 직후 처참하게 상처 받은 모습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반갑다.
 
프레드릭이 촬영한 신계사 3층 석탑 좌우에는 두 명의 스님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 하단에 ‘HEAD-PRIEST AND PAGODA : SINKEI-SA, DIAMOND MOUNTAINS’라는 메모가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주지스님과 탑 : 금강산 신계사’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HEAD - PRIEST’는 ‘고위 성직자’로 사찰의 주지스님을 표현한 것이다. 주지 스님은 가사를 수하고 주장자를 들고 있으며, 또 다른 스님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수행자의 위의를 보여준다.
 
신계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개산조(開山祖) 보운스님의 법명에서 이름을 지은 ‘보운강회(普雲講會)’가 운영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찾아와 교학 연찬과 참선수행을 병행한 도량이다.
 
선지식 한암(漢巖, 1876∼1951)스님도 신계사 보운강회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가 깨달음을 이뤘다고 한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당시 어전회의에서 옥새를 치맛속에 감추었다가 뺏긴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불교에 귀의한 후 망국의 설움을 달랜 도량이 바로 신계사이다.
 
한편 프레드릭이 을 발간한 것은 1917년이다. 하지만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1911년이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에 머물렀고, 이듬해에 조선을 다녀갔다. 따라서 신계사 3층 석탑과 스님들의 모습도 1911년이다.
 
1927년 8월18일자 <동아일보>에는 일제강점기의 신계사 정경을 묘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프레드릭이 다녀간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일제강점기 신계사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 소개한다. “온정리의 남(南) 1리(里)에 있다. 신라 법흥왕의 창설(創設)로 그 이후 수차례의 화재를 만났다. 지금은 이삼(二三)의 전각(殿閣)이 있을 뿐이다. 경내가 유요(幽遼, 한적하고 고요함)하여 소하(逍夏, 더위를 가심)에 제일 적당하다.”
 
프레드릭의 에는 이밖에도 많은 불교 관련 사진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는 이미 알려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선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추후 소개할 예정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692호/ 1월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