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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99. 혜진

 

99. 혜진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해 평생 수좌의 길을 걸은 혜진(慧眞, 1908~1984)스님. 오대산과 가야산, 불영산에 머물며 수행 정진한 혜진스님은 청빈한 삶의 표상이기도 하다. 정화불사 당시 종단 살림을 책임지며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한 혜진스님의 수행을 돌아보았다.
 
 
“삼독무명 끊고 자비희사하며 수도해야”
 
 
평생 수좌의 길에서 묵묵히 정진
 
정화불사 당시 종단 살림 ‘책임’
 
 
○… 평소 시주 은혜의 소중함을 강조한 혜진스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우물가 수채 구멍에 있는 밥알을 주어와 죽을 끓여 먹었던 것이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 있었던 일화이다. 그 모습을 본 젊은 스님이 “스님, 그러다 배탈이라도 나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나 혜진스님은 아무 거리낌 없이 죽을 쑤면서 미소까지 지었다. “이보게, 밥알도 시줏물(施主物)인데, 어찌 함부로 하겠는가. 시줏물을 함부로 하면 공덕이 없어. 그리고 절집에서는 그 어떤 것도 버리면 안 되는 것이야. 하물며 공양(供養)을 버리는 것은 큰일이지.”
 
○… 합천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제자가 대구 시내에 나와 탁발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제자의 고충을 차분히 경청한 혜진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탁발은 하심(下心)을 배우는 공부야. 돈을 구하려는 이유 때문에 탁발을 하는 것은 아니야. 탁발을 통해 중생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리고 시주의 공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으면 된다.” 당시 해인사에서는 1인당 3000원의 승려분담금을 내도록 되어 있었고, 주머니가 빈 학인들이 대구까지 나와 탁발을 통해 승려분담금을 마련했던 것이다. 인사를 올리고 나서는 제자에게 혜진스님은 3000원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공부가 됐으니 됐고, 고생도 했으니 앞으로 좋은 수행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이것 갖다 좋은데 쓰거라.” 제자가 사양했지만 끝내 은사의 성의를 물리치지는 못했다.
 
<사진>혜진스님 진영. 스님은 사진 한 장 제대로 남겨 놓지 않았다. 이 사진은 1979년 5월 부처님오신날 서울 운가사에서 찍은 것이다.
 
○… 한국전쟁의 포성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후반. 혜진스님은 ‘시골 울진’에 유치원을 세우겠다는 원력을 실천에 옮겼다.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공부는 무슨 공부냐”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가까운 지인들도 여건이 성숙한 뒤에 하는 게 좋다면서 만류했다. 하지만 혜진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고도 분명했다. “우리가 당장 먹고 살기 어렵다고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을 길러야 한다.” 불영사 울진포교당(지금의 동림사)에 문을 연 불교유치원은 금세 어린이들로 가득 찼다. 동심(童心)에 불심(佛心)을 심어준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선 혜안(慧眼)을 보여준 일화이다.
 
○… 제자들은 스승을 이렇게 기억한다. “꾸밈이 없고, 욕심을 내지 않으며, 단순 담백하게 사셨습니다.” 혜진스님은 스스로는 물론 남도 번거롭지 않도록 배려했다. 뜻을 세운 것은 반드시 실천에 옮겼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신세지는 일은 없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하는 모습으로 대중의 모범이 됐다. 울력에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해인사 선원 입승으로 있으면서, 대중울력에는 모두 참여했다. 대중과 함께 채소밭에서 잡초를 뽑고, 마당을 쓸었다. 먼저 나서 궂은일을 하니 대중이 따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 새벽3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불을 모신 뒤 아침공양 전까지 당신 방에 앉아 조용히 화두를 들었다.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사찰에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간혹 여행을 나서, 세속의 숙소에 머물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관에서도 새벽3시면 잠을 깼다. 간단하게 세수를 한 후에 예불을 모시고, 화두를 참구했다. 당시 스님을 모신 수혜스님(서울 운가사)은 “다른 대중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불도 켜지 않은 채 참선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 군에 간 제자가 제대하고 찾아왔다. 출가사문이지만 병역의무를 거부할 순 없었다. 노스님들은 젊은 수좌들이 군에 가면서 자칫 세속으로 아주 돌아갈 것을 염려했다. 그런데 제자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쁜 마음이 들었겠는가. 하지만 그 제자 역시 고민이 있었다. 세속으로 갈지, 산사로 갈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10여 일이 지났다. 혜진스님은 상좌를 데리고 정암사 적멸보궁의 수마노탑으로 갔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었다. 혜진스님은 손수 목탁을 치면서 기도를 하고 축원을 했다. “상좌가 재발심하여 부처님 공부 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은사스님의 간절한 축원에 감명 받은 제자는 삭발한 후 합천 해인사 선원으로 향했다.
 
<사진>혜진스님의 기고문. 1960년 1월1일 불교신문 창간호에 실린 것이다.
 
○… 또 다른 제자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토굴에 들어가 용맹 정진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겠다는 ‘큰 뜻’을 밝혔다. 기상이 넘치는 젊은 제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난 스님은 처음에는 토굴 정진을 만류했다. 대중생활과 달리 잘못을 경책해줄 수 있는 스승이나 도반이 없어 자칫하면 수행의 리듬이 흐트러져 오히려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의 의지가 분명함을 확인한 후 혜진스님은 당신의 회중시계를 건네주었다. “그래, 네 마음이 그러면 토굴에서 열심히 정진해 보거라. 그런데 토굴에서는 조금만 잘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공부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 이 시계는 태엽을 일정하게 감아줘야 돌아간다. 너도 시간을 잘 지켜 정진하고, 태엽 감듯이 제때 공양을 해서 건강을 잃지 않도록 해라.”
 
○… 울진 불영사에서 혜진스님이 주지소임을 보고 있던 1950년대 중후반. 불영사에는 20여 명이 수좌가 운집했다. 혜진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던 금담스님과 비룡스님도 함께 수행 정진했다. 세 스님은 방을 같이 사용하면서 서로의 공부를 점검하고 경책했다. 당시 세 스님을 시봉한 지성스님의 회고이다. “밤 10시가 되면 매일 오가피차를 끓여 선방에 들여보냈습니다. 오가피 차 한 잔으로 육신의 욕구를 달래며 다시 정진에 몰입하는 스님들을 곁에서 시봉하며 스스로 재발심을 했습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삼독무명(三毒無明)을 끊고 자비희사(慈悲喜捨)를 행하여야 수도(修道)에 조도(助道)가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출가부 대중은 세업(世業)을 망각하고 수도에만 전력을 다하게 하라.”
 
“세간 사업을 하여가며 염불참선(念佛參禪)을 하는 것은 재가이부(在家二部)가 할 의무일 것이요, 다만 걸사자격(乞士資格)은 불염제신(不染世塵)하고 안심수도(安心修道)하여 상보사중은(上報四重恩)하고 하제삼도고(下濟三途苦)하는 것이 진정한 출가본의(出家本意) 일 것이다.”
 
“중 도리(道理)는 신심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언제나 스스로를 버리고 하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출가자는 학문에 얽매이면 안 된다. 학문을 하면 학자이고, 학승(學僧)일 뿐이다. 그리고 행정을 하면 행정승(行政僧)이다. 시를 쓰면 시승(詩僧)이 되는 것이야. 참선을 해야 ‘참중’이나 신심을 갖고 참선을 해라. 그것이 ‘참중’이 되는 정도(正道)이다. 명심해라.”
 
 
 
■ 행장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
 
제방선원서 두루 정진
 
1908년 2월(음력)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고, 속성은 김(金)씨. 둘째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선친이 면장을 지낼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한학(漢學)을 공부한 후 만주 유학길에 올랐다. 용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한 후 천문(天文)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절에 가면 큰스님들에게 천문을 깊이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출가를 단행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 사문이 된 스님은 연담(蓮潭)스님을 비롯해 석우(石友).상월(霜月).석하(石下)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에게 불법(佛法)의 세계를 안내 받았다. 스승의 뜻에 따라 화두 참구를 공부의 방편으로 삼은 후 제방 선원에서 납자로 생활했다. 한때는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에서 참선을 공부했으며, 남쪽으로 내려와 가야총림 해인사 선방에서 입승 소임을 보는 등 ‘수좌의 기상’을 떨쳤다.
 
<사진>1954년 서울 선학원에서 열린 제1차 비구승대회. 세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혜진스님이다.
 
한국전쟁 당시 진주 연화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 수많은 피난민과 스님들의 수발을 들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울진 불영사에서 금담.비룡스님 등과 함께 정진했다. 울진 불영사 주지 시절에는 ‘불교유치원’의 문을 열어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자리 잡게 했다.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계승하기 위해 전개된 정화불사에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에는 총무원 재무부장 소임을 보며 종단의 어려운 살림을 책임졌다. 정화불사 당시 종단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산삼장수’에 나서기도 했다. 총무원장을 지낸 경산스님은 “혜진스님은 수좌의 사표이고, 일거수일투족이 진리 그대로 인 분이기 때문에 종단 소임을 맡긴 것”이라며 재무부장에 임명했다.
 
수행자의 외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진한 혜진스님은 1984년 4월10일(음력) 원적에 들었다. 세수 76세.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으며, 스님의 법구는 벽제화장터에서 다비했다. 별도의 비와 탑은 모시지 않았다. 수혜스님이 서울 운가사에 영구위패를 모셨다. 상좌로 지성스님(전 동화사 주지), 수성스님(대구 정토사 회주), 오형근 동국대 명예교수 등이 있다.
 
 
[불교신문 2644호/ 7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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