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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96. 학월경산

 

96. 학월경산

  
 
평생 불교중흥의 원력을 실천한 학월경산(鶴月京山, 1917~1979)스님은 수행자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정화불사 완성과 종단화합 성취를 위해 앞장섰다. 선.교.율의 정립(鼎立)을 발원했던 경산스님의 수행일화를 <대한불교(현 불교신문)>, <삼처전심(三處傳心)>과 군종특별교구장 자광스님의 회고를 통해 정리했다.
 
 
 
“역사가 요구하고 불보살이 증명한 불사만 할 것”
 

 “선·교·율 정립이 수행 정진의 근간”
 
  정화불사 종단화합 불교중흥 ‘발원’
 
 
○…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던 스님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 불자의 도리임을 역설했다. 평소 경산스님은 “율을 힘써 일으키니 교단이 튼튼해지고, 교단이 튼튼해지니 선종(禪宗)이 일어나고, 선종이 일어나니 교종(敎宗) 또한 따라서 일어났다”는 도선율사(道宣律師)의 말씀을 자주 했다. 선.교.율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은 <삼처전심>을 펴낸 것도 이 때문이다.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산스님의 육성이다. “율이 약해지니 자연 교단도 흔들려서 약해지게 되었다. 교단이 약해지니까 수행하는 제자들이 힘쓰지 않아서 또한 약해졌다. 선(禪)이 약해지니 교학(敎學)하는 제자들도 역시 힘쓰는 경향이 희박하게 되어 교(敎)도 또한 약해졌다.”
 
○… 선.교.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님의 육성을 계속 들어본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선.교.율 세 부문에 있다. 선.교.율은 세 발 달린 솥과 같다. 솥이 어느 다리 하나라도 떨어지면 제대로 서지 못하듯, 선.교.율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결여되면 마치 발 하나 떨어진 솥과 같다. … 선.교.율을 통해 불교,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겠다.”
 
<사진>경산스님. 주장자와 염주가 유품의 전부일 만큼 소박한 일생을 보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 “나는 총무원장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1979년 11월30일 세 번째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경산스님의 취임 일성이다. 당시 종단은 조계사 측과 개운사 측으로 갈라져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경산스님은 종단 화합을 위해 소임을 맡았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스님은 “종단 화합을 하기 위해 (총무원에) 온 것”이라면서 “앞으로 2개월 안에 종단수습을 마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취임 한 달만에 원적에 들어 종도들을 안타깝게 했다.
 
○… 총무원장을 세 차례 역임하는 등 종단의 핵심에 있었지만, 스님은 교구본사를 당신 문중의 절로 만들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님께서 노년에 머무실 만한 교구본사가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문도들도 교구본사가 있어야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도 했지만,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가자의 본분은 수행하는 것이지, 큰절을 차지하는데 있지 않다”면서 “더구나 총무원장을 지낸 내가 교구본사를 문중 절로 만들면, 남들이 크게 웃을 일”이라고 경책했다.
 
○… 스님은 한국불교의 정통성 회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1964년 7월19일자 <대한불교>에 게재한 ‘한국불교는 어디로’라는 제목의 기고에는 이같은 뜻이 잘 드러나 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요약했다. “한국불교는 천막형(天幕型) 같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점차로 올라만 갔고 고려 때에는 신라불교문화를 보존만 해왔다. 조선 때에는 고려 때 보존해 온 불교문화를 파괴의 일로(一路)로만 내려왔다. 한일합병을 당하자 불교는 사회적으로 극도의 거센 핍박은 일단 중지됐으나,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으로 교단은 또다시 여지없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광복 후 파멸된 교단을 재건하려고 우리 불교도나 국가나 일반민중이나 언론기관까지 총동원하여 노력하고 있다.”
 
○… 1960년 9월8일자 <대한불교>에는 경산스님을 대하는 제자의 심정이 담겨있다. ‘나의 스님을 말한다’는 코너에 실린 글이다. “여기에 먼 태고(太古)의 비밀을 홀로 아는 기쁨에 묻혀 한 없는 깊이와 무한한 무게로 고요히 우주의 영원을 넘겨다보는 묵묵한 신비의 산이 있다.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속이는 사람에게도 대하는 표정은 여일(如一)하다. 스님은 뭇사람들이 어떻게 대하건 아랑곳 하지 않았다. 미워해도 사랑해도 존경해도 영원한 평화 속에 진리만을 염원하여 묵묵한 신비에 잠긴 그 산에겐 슬픔도 원한도 기쁨도 주지 못하리라. 그 이름은 ‘경사로운 산’이다.” 이 글에서 ‘경사로운 산’은 경산(京山)스님 법명의 또 다른 표기인 ‘경산(慶山)’을 나타낸 것이다.
 
○… 1964년 스님은 생전 처음으로 외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국에서 열리는 WFB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1965년 2~3월에 발행된 <대한불교>에는 스님의 기행문 ‘조감천축기(鳥瞰天竺記)’가 실려 있다. 1964년 11월20일 홍콩에 도착한 후 기록한 소회에는 스님의 ‘생생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어디를 가나 언어의 장벽과 생활의 이취(異趣), 그리고 제도가 갖는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인간을 하나이게 하는 ‘맛’을 나는 오래도록 입안에서 굴리며 또 심증에서 다짐하는 것이다. 10시. 자리에 누운 나의 눈에 하늘의 별은 나의 그러한 심증을 더욱 여실히 입증하는 증인처럼 맑게 빛나고, 국제도시는 밤의 고요 속에 싸여들기 시작하였다. 문득, 그리고 분명하게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다’는 확신을 나는 얻는다. 오늘까지 나는 내가 맡고 있는 여러 가지 소임으로 해서 ‘잘 되어야겠다’는 아쉬움 속에 놓여 있었으나, 지금 나는 무한한 자유와 그리고 옛 조사들이 누차 일렀던 진리에 대해 더없는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나는 조용한 잠에 빠져 들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나는 역사와 인류가 요구하는 불.보살이 증명하는 불사(佛事)만을 하겠다.”
 
“불교를 아는 사람은 자기의 성(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자기의 성이 공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부처님의 성과 중생의 성이 다 공한 것을 깨친 사람이다.”
 
“나는 40여 년간을 부처님의 집에서, 부처님의 밥을 먹고, 부처님의 옷을 입고, 부처님의 약을 먹고 살았으면서도, 이 한 줄의 글을 쓴다는 것이 몹시 송구스러울 뿐이다.”
 
“우리 불자가 재가 제자나 출가 제자나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세계 인류를 위하는 대승적 마음으로 정진한다면 민족 문화의 중흥에 이바지할 것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이룩될 것이며, 세계 평화의 구현에 주체적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란 생각을 깨달으면 보리요 미(迷)하면 번뇌이니 한 생각을 잘 쓰면 화합이요, 잘못 쓰면 분열이다. 분열은 불안과 파괴의 근본이나, 화합은 극락의 정토를 건설할 근본적 관건이다.”
 
 
 
■ 경산스님의 ‘종단화합 발원’
 
1970년대 말. 종단은 분열과 대립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반목과 갈등을 끝내고, 화합을 염원하는 불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이같은 상황에서 경산스님은 종단 화합의 숙제를 풀 적임자로 손꼽혔다. 선교율을 겸비한 수행자이고, 두 차례 총무원장을 지낸 행정가였기 때문이다. 1978년 6월 스님은 ‘종단의 화합을 발원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종단화합의 발원을 밝혔다. 그 가운데 일부이다.
 
“부처님께서는 살부지원수(殺父之怨讐,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은혜로 갚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49년간을 고구정녕(苦口寧)으로 부촉(咐囑)하신 가르침에 무조건 귀의하셔서 승가본연의 자비심으로 돌아가서 한 생각을 태허(太虛)와 같이 텅 비워서 우리가 혹 자비심이 메말랐더라도 있는 양 서로 양보하시고 상대방을 이해 용서하시여 웃고 나가고 웃으며 위로하는 미덕을 불교를 모르는 일반사회나 불자들에게 남겨 줍시다. 그리고 우리 후진(後進)들에게도 아름다운 전통을 남겨줍시다. 소납(小衲)이 자비도 지혜도 없는 줄을 스스로 잘 헤아리면서도 잠시 겨자씨만한 보살심을 발(發)했사오니 너그럽게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종단이 정상화 되는대로 수행인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 행장
 
유점사 수암스님 은사로 출가
 
주장자 · 염주가 유품의 ‘전부’
 
1917년 6월21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손희진(孫喜璡).
 
1936년 4월8일 금강산 유점사에서 홍수암(洪秀庵)스님을 은사로 불가(佛家)에 입문했다. 같은 해 유점사에서 해운(海雲)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40년 4월10일 유점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하고, 194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1949년 8월2일 경남교무원에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품수 받았다. 금강산 마하연과 오대산 상원사를 비롯해 금정산 범어사, 덕숭산 정혜사,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돌며 수행 정진했다.
 
1955년 8월20일 중앙종회 의원에 선출되고, 1958년 5월10일에는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에 선임됐다. 이후 재단법인 동국학원 이사장(1962년), 조계종 총무원장(1963년, 1973년, 1979년), 제9교구본사 동화사 주지(1972년), 중앙종회 의장(1978년) 등을 지내며 한국불교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이밖에도 한국종교협의회장(1974년), 한국불교총연합회장(1975년), 한국불교매스컴위원회 총재(1979년) 등을 맡기도 했다.
 
<사진>경산스님의 친필. 평상심시도. 일상에서의 마음이 곧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출처=<삼처전심>
 
특히 스님은 1956년 효봉.청담스님 등과 함께 정화불사에 참여해 입적할 때까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한편 종단화합과 불교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스님은 1979년 12월25일 오전 갑자기 입적했다. 법납 42세, 세수 63세. 12월29일 서울 화계사에서 다비를 엄수했으며, 적조사에 부도를 모셨다. 경산스님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남긴 유품이라곤 주장자와 염주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불교신문 2634호/ 6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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