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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95. 탄허택성

 

95. 탄허택성

 
 
교학은 물론 참선수행에도 높은 경지에 도달했던 탄허택성(呑虛宅成, 1913~1983)스님. 한암스님의 법맥을 계승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펴고자 했던 탄허스님은 200여 권의 저술을 남기며 중생의 곁에 있고자 했다. 화엄사상 기반위에 참선사상을 아우른 탄허스님의 수행일화를 <대한불교(불교신문의 전신)> 기사와 제자인 탄허문화재단 이사장 혜거스님(서울 금강선원장)의 회고로 재구성했다.
 
 
“법당 100채 짓는 것보다 공부가 더 중요해”
 
 
“길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 경계하라”
 
화엄사상 기반위에 참선수행 아울러
 
 
○… 새벽 2시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세면을 마치고는 곧바로 책을 펴고 앉았다. 새벽예불이 끝나면 제자들이 스님의 처소를 찾았다. 은사와 함께 경을 읽고 해석을 했다.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젊은 제자들은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은사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진하는 모습에 꾀를 부릴 수도 없었다. 잠을 못이기는 제자에게 탄허스님은 “수마(睡魔)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어찌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겠느냐”고 경책을 했다.
 
○… 스님은 인재 양성에 남다른 원력이 있었다. 1966년 화성 용주사에서 열린 동국역경원 역장(譯場) 개원식에서 탄허스님은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스님들 공부를 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입장은 출가 초기 강원도 3본산이 합동으로 승려강습소를 개설하면서 은사의 권유로 강의를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했으며, 이후 오대산 월정사에 5년 과정의 수도원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이다.
 
<사진>탄허스님 진영.  불교신문 자료사진
 
○…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이며, 이는 곧 세상에서 말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와 다름이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세상만사는 새옹지마 같아 성쇠(盛衰)가 맞붙어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역경(逆境)을 당한다고 서러워할 것도 없고 순경(順境)을 만난다고 좋아할 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탄허스님은 “만일 강폭(强暴)한 원자탄.수소탄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면 우주의 원리는 필요 없는 것”이라면서 흔들림 없이 정진하고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 탄허스님은 누가 와서 만날 것을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식견이 깊은 이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반갑게 맞이해 몇날을 함께 지냈다. 마음이 맞고, 받아들일 것이 있다면 겸상도 마다하지 않았던 소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 “여러분이 절에 다니는 것도 깨끗한 행동이 되고, 부처님 앞에 서면 조금이라도 경건해지려고 하는 것도 깨끗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실천한다면 여러분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청정행을 닦는 것이 됩니다.” 스님은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는데서 수행이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탄허스님은 평소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죄를 합쳐 ‘십악(十惡)’이라고 한다”면서 “십악의 반대는 ‘십선(十善)’으로, 살생.도둑.음행 등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곧 계행을 지키는 지름길이며 바른길임을 제시했다.
 
○ … 1973년 12월30일자 <대한불교(불교신문의 전신)>에 실린 한 편의 글에는 탄허스님의 원력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당시 신문사에서 각계 저명인사에게 ‘새해 설계’라는 주제로 원고를 청탁했다. 이 글에서 탄허스님은 은사인 한암스님의 유촉을 받들어 화엄경을 번역하는 일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갑인(甲寅) 새해는 선사(先師) 한암스님의 유촉을 받아 화엄경 우리말 번역을 위해 준비한지 이미 40여년,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80권, 논 40권. 청량(淸凉)선사의 소(疏)를 합하여 우리말로 번역한지 10여년이 된다. 이제 우리말 화엄경의 출판을 서둘러 새해 안에는 최소한 1차적으로 조성을 마치는 것이 갑인(甲寅) 한해의 계획이기도 하며, 또 사명이기도 하리라. 좀 더 윤문(潤文)을 하여서 새해 납월말경(臘月末頃)에 조판을 끝낼 수 있으나, 만일 불음(佛音) 홍포(弘布)에 뜻을 가진 독지가(篤志家)가 나와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준다면 (19)74년 안으로 인쇄에 들어가서 (19)75년6월경에는 수십 년 내의 숙원인 우리말 화엄경 출판을 끝내, 위로 역대불조(歷代佛祖)와 아래로 중생은(衆生恩)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인재양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탄허스님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스님 가운데는 희찬(전 월정사 회주).운학(전 동국대 교수).성파(전 통도사 주지).혜거(금강선원장).명성(전국비구니회장).성일(화성 신흥사 )스님 등이 탄허스님 회상에서 공부했다. 원조각성.제월통광.여천무비스님이 전강제자이다. 재가자로는 박성배 뉴욕 주립대 교수, 서경수 전 동국대 교수, 박완일 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여익구 전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고은 시인, 황석영 소설가도 스님과 잦은 교류로 친분이 깊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탄허스님의 친필. ‘화리생연’이다. 제공=김연호
 
 
 
■ 어록
 
“도(道)의 근본이란 바른 것이겠지. 도란 진리의 대명사가 아니겠어. 한마디로 길을 가리킨 거야. 길을 걷되 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돼. 왜냐면 길이란 오름길이던, 오솔길이던, 길은 길이 아니겠어. 그런데 길 밖으로 빠져나가면 필경엔 진흙구덩이와 가시밭과 어둠 속으로 갈팡질팡하게 되는 게지.”
 
“옛 말씀에 도(道)를 잃으면 덕(德)이라도 갖추어야 하고, 덕을 잃으면 인(仁)이라도 베풀 줄 알아야 하며, 인을 잃으면 의(義)라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잃으면 예(禮)라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지. 그런데 요즘 예도 잊으니 끝내는 법률학(法律學)이 나오지 않겠어. 자의(自意)에 의한 길을 걷는 나그네가 아니다. 요즘 사람은 타의(他意)에 의한 방랑자가 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돼.”
 
“생사 문제야말로 무엇보다 앞선 궁극적인,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몸을 담고 살아가는 동안 기필코 해 나가야 할 중심문제이다.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구멍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다. 본디 마음이 나온 것이 없음을 확연히 갈파한 것을 도통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나온 구멍이 있는지. 따라서 나온 구멍이 없으므로 죽는 구멍도 없다.”
 
 
 
 
■ 행장
 
독립운동가 집안서 출생
 
한암스님 제자로 ‘입산’
 
1913년 음력 1월15일. 전북 김제에서 독립운동가인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 선생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택(金鐸).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간산(艮山). 법명은 택성(宅成 또는 鐸聲). 법호는 탄허(呑虛).
 
어려서부터 10여 년간 부친과 조부에게 사서삼경 등 유학을 공부하며 학문의 경지를 넓혔다.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옥바라지를 했다. 17세에 기호학파의 이극종(李克宗) 선생에게 각종 경서(經書)를 배웠다. 20세 즈음 ‘도(道)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한암(漢岩)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후 한암스님과 2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1934년 음력 9월 5일. 22세에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한암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은 후 3년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묵언 수행을 했다.
 
<사진>탄허스님이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한 오대산 월정사 전경. 불교신문 자료사진
 
1936년 유점사.건봉사.월정사 등 ‘강원도 3본산’이 상원사에 설치한 승려연합수련소에서 중강(中講)으로 <금강경(金剛經)>.<기신론(起信論)>.<범망경(梵網經)> 등을 강의했다. 세수 24세의 약관으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스님의 실력과 신심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1939년(27세)에는 연합수련소에서 <화엄경>과 <화엄론>을 강의했다. 11개월간의 강의가 끝 난후 한암스님은 탄허스님에게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에 대한 현토 간행을 유촉했으며, 이후 스님은 은사스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스님은 교학뿐 아니라 참선 수행도 깊이 했다. 은사인 한암스님을 모시고 15년 동안 선원에서 좌선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은사의 권유로 전등록(傳燈錄), 선문염송(禪門拈頌), 선어록 등을 익혔다.
1955년 조계종 강원도 종무원장 겸 월정사 조실로 추대된 후 후학 양성에 적극 나섰다. 1956년 4월 오대산에 5년 과정의 수도원을 세웠다. 강원 대교과 졸업자나 대졸자, 또는 유가의 사서(四書)를 마친 자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오대산 수도원은 정화불사로 인한 재정난 때문에 1958년 문을 닫고 말았으며, 스님은 남은 제자들과 영은사로 자리를 옮겨 1962년까지 연찬을 계속했다.
 
이후 스님은 1962년 월정사 주지, 1965년 동국대 대학선원장, 1966년 동국역경원 초대 원장, 1975년 동국학원 이사 등의 소임을 보았다. 스승의 유촉에 따른 <신화엄경합론> 원고를 1967년에 마무리 지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제3회 인촌문화상과 조계종 종정상을 동시에 받았다. 노년까지 매일 원고를 집필하는 것을 거르지 않던 스님은 열반에 들기 일주일 전까지도 마지막 교정에 혼신을 다했다.
 
스님은 1983년 음력 4월 24일(양력 6월 5일)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일체무언(一切無言)’이란 임종게를 남기고 고요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 71세, 법랍 49세.
 
 
[불교신문 2632호/ 6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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