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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92. 지월병안

 

92. 지월병안

 
 
‘가야산의 인욕보살’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지월병안(指月炳安, 1911~1973)스님. 비록 키는 작았지만, 스님이 보인 깨달음의 바다는 깊고 넓었다. 그 누구를 만나도 하대(下待)하지 않고, 오직 불연(佛緣)을 소중히 여기고 정진할 것을 당부한 우리 시대의 스승이 바로 지월스님이다.
 
 
 
 
“죽은 셈 치고 한평생 정진에만 몰두해야”
 
 
   한암 · 만공 · 지암스님 회상에서 수행
 
   누구에게나 하심한 ‘가야산 인욕보살’
 
 
○… 1960~70년대 해인사에서 수행한 스님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이 한 가지씩 있다. 그것은 바로 지월스님과의 사연이다. 후배스님에게도 꼭 존댓말로 말을 건넨 지월스님이었다. 낯선 스님을 만나면 은사가 누구인지 출가본사는 어디인지 물었다. 아무개 스님이시고, 아무개 절이라는 말을 듣고 난 후 지월스님의 답은 한결 같았다. “아 그래요. 그 스님 아주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을 은사로 모셨으니, 스님의 참으로 청복(淸福)을 갖고 계시네요. 열심히 수행정진해서 은사스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출가본사도 청정도량(淸淨道場)이니, 스님께서는 불연이 아주 깊으시군요. 열심히 정진하세요.” 지월스님은 부처님 제자가 되어 공부하는 공덕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당부했던 것이다.
 
<사진>지월스님의 진영. 작은 키에 꼭 다문 입에 수행자의 강한 의지가 보인다. 출처=‘지월대선사영첩’
 
○… 해인총림 해인사 행자실에는 지월스님의 글씨 한 점이 걸려있다. 출가초심을 내고 생활하는 행자들에게 지침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심(下心)이란 글씨이다.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살다보면 하심보다는 ‘나를 드러내는’ 상심(上心)을 하기 쉬운 게 사실이다. 지월스님은 오직 스스로를 낮추고 낮추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라 여겼다. 출가의 첫발을 내딛은 행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하심이다. 행자실에 있는 지월스님의 하심이란 글씨의 ‘아래 하(下)’는 아래로 길게 늘여 썼다. 그리고 ‘마음 심(心)’은 정상적인 모습이다. 낮추고 낮추어야 본래 마음(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지월스님의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상징적인 글이다.
 
○… 지월스님은 평소 출가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님은 출가에 대해 ‘원리행(遠離行)’이라고 지적했다. “번뇌 망상 덩어리를 멀리 떠난다”는 것이 원리행의 뜻이다. 다음은 스님의 육성이다. “우리 스님네는 다겁생래(多劫生來)에 불법인연이 깊고 깊어 이미 출가위승(出家爲僧)하였으니, 중생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인 번뇌망상에서 반드시 멀리 뚝 떠나야 하겠습니다. …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편하게 산다 해도 한량없는 번뇌망상에 얽어 맺히어 걱정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움에 시달려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어찌 한가롭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 지월스님은 눈물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스님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고, 다른 것에 눈을 돌릴 때 더욱 그러했다. 후학들이 잘못을 하면 경책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지월스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방수좌들과 강원학인들이 해인사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도 그렇고, 수좌들이 휴식시간에 잠시 노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생각과 맞지 않은 행동을 보고 혼을 내거나 다른 벌칙을 줄 수도 있었지만, 지월스님은 그저 눈물 흘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지월스님을 보고 후배스님들이 더욱 정진에 몰두했음은 물론이다. 스님은 평소 “스님 노릇하는 것은 한량없는 복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자는 신심(信心)이 양식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 해인사에서 공양을 짓는 것은 행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100여명이 넘는 대중의 공양을 준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밥의 물을 적당히 맞추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새벽 행자가 밥을 하는데 뜸을 제대로 들이지 못해 위에는 설고, 아래는 타버렸다. 호랑이 스님들이 알면 경을 칠 일이다. 지월스님의 말 “밥이 꼬들꼬들한 것이 맛이 좋습니다.” 며칠 뒤 같은 행자가 밥을 했는데, 이번에는 죽처럼 되었다. 이를 본 지월스님이 말했다. “밥이 촉촉하게 되었군요, 맛이 좋습니다.”
 
<사진>해인총림 해인사 법보전 앞에서 함께 한 일타스님과 지월스님(오른쪽).  출처=‘지월대선사영첩’
 
○… 해인사 수곽(水廓)에서 한 행자가 쌀을 씻다가 모르고 반토막난 쌀을 떨어트렸다. 우연히 지나가 반토막 쌀을 본 지월스님이 주워들고 공양간으로 들어왔다. 쌀을 손바닥위에 올리고 공양간에 들어선 지월스님은 “쌀 한 톨에 시주 은혜가 일곱 근(斤)이라고 합니다. 비록 반토막이지만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삼보정재의 소중함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스님은 기차를 탈 때도 1등석이 아닌, 3등석만 이용했다고 한다. 스님은 낙엽이나 풀을 긁어모아 해인사 해우소에 넣어, 이후에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 또 다른 일화. 해인사에 해충이 있어, 대중이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마을에서 약을 구해온 스님들이 도량 곳곳에 약을 뿌렸다. 그러나 지월스님 방에는 약을 치지 못했다. 지월스님의 이유다. “다른 스님들은 벌레가 물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마(睡魔)가 찾아올 때 잠을 쫓아주니 얼마나 고마운 도반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지만 ‘생명을 지닌 존재’임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지월스님 어록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대저 중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福)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숙세(宿世)의 선근인연(善根因緣)으로 이렇게 불법을 만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한바탕 안난 셈 치고 또 한 번 이미 죽은 셈 치고 어천천만만사(於千天萬萬事)를 걷어치우고 필생의 노력을 다하여 일념정진(一念精進)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거품과도 같고 비지덩어리 같은 이 몸뚱이에 속아 살며 탐욕심과 짜증과 교만한 마음을 만들어 맑고 밝은 자성광명(自性光明)을 흐리게 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인욕과 정진은 부처님이 성불하신 양대력(兩大力)이라 했습니다. 인욕은 안락행(安樂行)이요, 정진은 열반도(涅槃道)라 하시니 부처님 6년 고행이 오직 인욕과 정진일 따름입니다.”
 
“하지 않고 되는 일이 어디 있나요. 다만 끝까지 애쓸 따름입니다. 애쓰는 그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마음이 순화(純化)될 때 무량한 자비심이 저절로 우러나게 됩니다. … 우리는 불조의 말씀대로 불조의 가신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야만 하겠습니다. 일인(一忍)이 장락(長樂)이라 했는데, 어찌 하지 아니하며, 하면 되는 것을 하지도 않고서 안 된다고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 행장
 
   평생 42안거 성만한 수좌
  
  ‘정화불사’에도 적극 참여
 
1911년 2월4일 전북 남원군 동면 인월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옥적(金玉赤)선생이고, 모친은 이 씨였다. 본관은 청도(靑道). 속명은 김봉만(金奉萬).
 
16세에 출가하여 오대산 월정사 지암(智庵)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상원사에 주석하고 있는 한암(漢岩) 회상에서 정진하다, 25세에 범어사 율사 일봉(一鳳)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했다.
 
<사진> 지월스님이 주석한 해인총림 해인사의 장경각. 불교신문 자료사진
 
이후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滿空)스님을 모시고 각고정진(刻苦精進)하다 깨달음의 세계를 맛보았다. 이때 스님은 “환화공신(幻化空身, 환영이 만들어낸 몸뚱이)이 곧 천진불(天眞佛)”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스님은 평생 자비삼매(慈悲三昧)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수행의 결과를 펴는 방편으로 삼았다. 평생 42안거를 성만한 수좌였다.
 
51세 이후 해인사에 주석하며 후학을 인도했다. 인욕보살이 스님의 대명사였다. 해인사 선원 유나에 이어, 총림 개설 후 첫 해인사 주지 소임을 보았으며, 종단에 정화불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 칠 때는 한국불교의 정통 맥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1954년 9월에 열린 전국비구승대회에도 직접 참석했다. 지월스님은 뜻을 같이한 스님들과 여석회(餘石會, 남은 돌 모임)를 만들어 수행풍토 조성과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여석회 회원은 다음과 같다. 지월.운허.홍경.영암.탄허.고암.벽안.구산.석주.자운.석암.청우.대휘.서옹.월하.청담스님.
 
회갑이 지난 후 설악산 봉정암과 오대산 상원사 등의 적멸보궁과 호남지역의 고찰(古刹)을 순례했다. 1973년 3월27일 밤 문도들에게 “불조(佛祖)의 말씀대로 간단(間斷)없이 각자 노력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홀연히 입적했다. 스님의 세수 63세, 법납 47세였다. 스님의 부도와 비는 해인사에 모셨다. 상좌로 도견.도성.운범.도완.도선.도일.도각.도허.도혜.도공.도산.도청.도현.도원스님을 두었다. 후학들은 스님 입적 후에 행장과 사진을 담은 <지월대선사영첩(指月大禪師影帖)>을 발간했다.
 
 
[불교신문 2621호/ 5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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