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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무학대사 - 억불에 맞선 스님의 기개 ‘꼿꼿’

 

무학대사 - 억불에 맞선 스님의 기개 ‘꼿꼿’


“(무학대사는) 본질을 숭상하고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스스로 봉양하는 것을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희사하였다. 또 그가 사람을 접하는데 겸손하며, 남을 사랑함이 정성스러움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힘써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대체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에서 불교를 근간으로 조선조 건국에 크게 기여한 마지막 왕사 무학 자초스님(無學 自超, 1327~1405).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입적한 자초스님의 비문을 쓴 문신 변계량은 자애로웠던 스님의 성품을 이 같이 찬탄했다.

 

대개 지공ㆍ나옹선사와 함께 봉안

은해사 백흥암엔 따로 있어 ‘눈길’

<사진> 영천 은해사 백흥암에 봉안돼 있는 무학대사 진영.

사부대중에게는 무학대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스님은 고려 말인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대사의 속성은 박 씨,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간(溪月幹)이다. 18세가 되던 해인 1344년(충혜왕 5년) 출가해 소지선사에게서 계를 받은 뒤 다시 용문산 혜명국사에게서 불법(佛法)을 배웠다.

이어 20세가 되던 1346년(충목왕 2년) <능엄경>을 보다가 홀연히 깨우친 바가 있어 그때부터 진주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 머물면서 수행정진하다 27세가 되던 해 1353년(공민왕 2) 원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인도출신의 고승 지공선사를 만나 도를 인가받고, 다음해 평생 스승으로 모신 나옹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1356년 고려로 돌아온 무학대사는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산천을 주유하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고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조선 태조는 스님을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왕을 교화하고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위상을 높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스님은 1405년 78세, 법랍 62세를 일기로 금강산 금강암에서 열반에 들었다.

이처럼 한국불교사의 큰 족적을 남긴 무학대사의 진영은 양산 통도사, 여주 신륵사, 순천 선암사, 상주 남장사, 남양주 불암사, 양주 회암사 등에 봉안돼 있다. 이들 대부분 사찰의 진영은 무학대사 이외에도 지공선사, 나옹선사와 함께 그려진 ‘삼화상’ 형식으로 봉안돼 있다.

이에 반해 영천 은해사 백흥암에는 무학대사의 진영만 따로 봉안돼 있어 눈길을 끈다. 홍진국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고승 17점과 함께 봉안돼 있는 백흥암 내 무학대사의 진영은 좌향7분면 형식을 띠고 있다. 적색과 짙은 녹색의 두터운 색조의 사용, 필선, 돗자리 배경 등은 ‘백흥암 극락전 감로도’(1972년 제작)와 같은 채색과 기법으로 되어 있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15호/ 4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