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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각진국사 - 멀리서는 ‘신비’ 가까이선 ‘온화’

 

각진국사 - 멀리서는 ‘신비’ 가까이선 ‘온화’


“(각진국사의)사람됨이 간묵하고 맑고 순박하며, 단아하고 평화스러우며 곧고 정성스러웠다. 이마는 푸르고 눈썹은 반만 희고 입술은 붉고 이는 희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깨끗하기가 신선과 같고, 가까이 나아가면 온화하기가 부모와 같았다. 입으로는 남의 선악을 말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는 공경함을 지니고 있었다. 평생을 방장으로 지냈으나 한 개의 재물도 갖지 않았다.”

순천 송광사 제13세 국사로 전법과 선풍을 진작시킨 고려시대 고승 각진국사 복구스님(復丘, 1270∼1355). 왕명을 받들어 복구스님의 비문을 지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달충은 스님의 업적을 이 같이 찬탄했다.



단정한 자세, 스님 성품 드러내

어긋난 원근법 처리…古式 반영



<사진> 장성 백양사에 봉안돼 있는 각진국사 진영.

복구스님의 본관은 고성, 속성은 이 씨로 어려서부터 불법(佛法)을 존경하였고, 놀 때도 불가의 규칙을 따랐다고 한다. 10살의 나이로 순천 조계산 수선사(현재 송광사)에서 천영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다 천영스님이 일찍 입적하자 수선사 제12세인 자각국사 도영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복구스님은 수행과 경전공부에 매진해 21세에 승과의 하나인 선선상상과(禪選上上科)에 합격했으나, 조계산 산중에 머물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이후 스님의 명성이 온 나라에 알려져 고려 충정왕은 스님에게 ‘각엄존자(覺儼尊者)’를 내려 왕사로 책봉했다. 또 공민왕 때 재차 왕사로 책봉돼 영광 불갑사에서 주석했다.

당시 공민왕은 스님의 건강을 염려해 직접 궁궐로 모시지 않고 진영만을 그려 예를 표하는 등 지극한 정성으로 스님을 섬겼다. 스님은 1355년 백암사(현재 장성 백양사)에서 세수 86세, 법랍 76년을 일기로 입적했다. 공민왕은 입적한 스님의 덕을 흠모하며 국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각진(覺眞), 탑호를 자운(慈雲)이라고 내렸다. 1359년(고려 공민왕 8)년 이달충이 비문을 짓고, 이제현이 글씨를 쓴 스님의 비는 현재 영광 불갑사에 보전돼 있다.

이처럼 한국불교에 큰 업적을 남긴 복구스님의 진영은 장성 백양사에 봉안돼 있다. 화기에 따르면 이 진영은 1825년(순조 25년) 1월 선운사 내원암에서 화원 장유가 조성해 백양사로 옮겨졌다고 돼 있어 후대에 원본을 보고 다시 그려진 이모본(移模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전체양식은 고려 말에 유행했던 선종의 조사상(祖師像)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신 좌안 7분면의 의자상으로 왼손에는 석장(錫杖)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있다. 두상은 작지만 평온하고 자상한 느낌을 주며 단정한 자세에서도 스님의 성품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배경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답대(踏臺) 아래로는 원근법에 어긋나게 그려진 자리가 부분적으로 깔려 있어서 더욱 고식(古式)을 반영하고 있다. 다른 여러 스님들의 진영의 원본이 거의 전래하지 못한 현실을 감안할 때 원본을 그대로 베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진영은, 상용형식(像容形式)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적으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09호/ 3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