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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보조국사 - 호랑이의 눈으로 결사를 이끌다

 

보조국사 - 호랑이의 눈으로 결사를 이끌다

 

“부처님 법을 빙자해 풍진(風塵)의 세상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옷만 밥만 허비하고 있다. 비록 출가하였다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고려시대 대표적인 고승 보조국사 지눌스님(知訥, 1158~1210)은 밖으로는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타락하고, 안으로는 선과 교가 극심하게 대립.갈등하던 12세기 고려불교의 실상을 이같이 탄식했다. 타락한 고려불교에 대한 통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결사(結社)를 주창한 지눌스님은 도반 10여명과 함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함께 결사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평등이 하는 일에 힘쓰고, 예불하고 경 읽기와 운력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가 맡은 일을 다 하자’고 서원했다. 이것이 바로 정혜결사의 시작이다.

 

갈색배경, 무채색 얼굴 부각시켜

화려한 의자.유려한 필선 ‘섬세’

<사진>순천 송광사 국사전에 봉안돼 있는 보조국사 진영.

조계종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지눌스님의 속성 정(鄭),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다. 1165년(의종 19) 8세의 나이에 사굴산문 종휘선사에게 출가한 스님은 25세에 승선(僧選)에 합격한다. 이후 스님은 출세의 길을 멀리하고 창평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 등에 머물면서 대장경을 열람하고, 정혜를 닦았다. 41세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이전의 동료들을 모아 정혜결사를 행한다.

이후 순천 송광사로 옮겨 수선결사를 행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대총림을 이루게 된다. 이후 스님은 <정혜결사문>을 비롯해 <수심결>, <진심직설>, <계초심학인문>, <원돈성불론>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53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지눌스님의 비명을 찬한 고려시대 문신 김군수는 스님의 삶에 대해 ‘우행호시(牛行虎視)’라 표현했다. 한 평생 수행자의 모범적인 삶을 살아갔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호랑이의 눈을 가지고 당시 불교계를 진단했다.

이는 소처럼 우직하게 결사의 실천적인 삶을 살다간 스님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관광부는 스님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2001년 5월 문화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눌스님의 진영은 순천 송광사, 대구 동화사, 여수 흥국사 등에 봉안돼 있다. 이 가운데 보물 제1043호로 지눌스님을 비롯해 진각 혜심스님, 청진 몽여스님 등 16국사를 함께 모신 송광사 16국사진영과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동화사 진영이 대표적이다.

송광사 국사전에 모셔져 있는 16국사 진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됐다. 이 진영에 그려져 있는 스님들의 가사는 모두 첩상가사로 색채의 다양한 배합과 적절한 면의 분할로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동화사 조사전에 봉안돼 있는 지눌스님의 진영은 짙은 갈색을 배경으로 무채색의 얼굴과 법복을 화면에 자연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 삼매(三昧)에 잠긴 얼굴, 시선을 이끄는 가사의 녹색 조(條)와 붉은 족대(足臺), 화려하게 장식된 나전칠기 의자, 유려한 필선 등의 섬세한 표현이 큰 특징이다. 고졸하고 단아한 조선중기 초상화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05호/ 3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