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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명정학교 ‘설립시기ㆍ위치’ 확인

 

명정학교 ‘설립시기ㆍ위치’ 확인

근세불교 미공개 자료를 찾아 1910년대 부산 청룡초등학교


자료(資料)는 곧 역사(歷史)이다. 문집 도서 사진 편지 일기 서류 등의 자료는 역사를 복원하는 귀중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근세불교 자료는 그다지 많은 상황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혼란을 겪으면서 많은 자료가 유실됐다. 이에 본지는 조선후기 이후 불교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함으로써 자료의 소중함을 확산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개교 100주년을 맞은 부산시 금정구 청룡초등학교(교장 허성찬)가 본지를 통해 공개한 설립 초기 졸업사진 등 학교 자료를 소개한다.



 <사진> 1914년 사립명정학교 졸업식 모습. 맨 뒷줄에 성월스님(오른쪽에서 4번째) 등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부산 청룡초등학교  

                           

            

1908년 범어사 금어암서 개교…귀중한 자료 
                 

 당시 교장지낸 혼해ㆍ용곡스님 모습등 선명 
              
 졸업생 315명 배출…1931년 공립으로 전환

                            

청룡초등학교가 이번에 공개한 것은 부산 범어사가 설립한 명정학교 관련 사진과 서류이다. 사립명정학교 2회(1913년) 3회(1913년) 5회(1916년) 11회(1922년) 졸업사진을 비롯해 명정보통학교 3회(1929년).4회(1930년).5회(1931년) 졸업사진 등 모두 7장이다. 이와 함께 설립 초기 학교상황을 기록한 서류 1권도 공개했다. 청룡초등학교는 이 자료들의 원본을 학교 역사전시실에 보관하고 있다.

공개된 학교 자료에는 사립명정학교의 설립 시기가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사립명정학교는 1908년 5월 1일 범어사 금어암에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명치41년 5월1일 범어사 금어암내(金魚庵內)에서 사립명정학교(私立明正學校)라는 이름으로 창립(創立)” 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인가를 받은 것이다.

또한 범어사 침계료로 이전한 시기도 확인할 수 있다. “명치42년9월 교사(校舍,학교건물)를 동사(同寺, 범어사) 침계료(枕溪寮)의 신교사(新校舍)로 이전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대정 11년 취학 아동이 증가하여 학교 건물을 현재 위치로 이전했음”이란 기록을 통해 명정학교의 변천 역사의 객관적 자료로 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기록에 따르면 사립명정학교 건물은 1908년5월부터 1909년 8월까지는 범어사 금어암에 설치되었으며, 1909년9월부터 1921년까지는 범어사 침계료에서 학생들의 교육이 진행됐다. 이어 지금(부산시 금정구 청룡동)의 위치에 학교가 옮겨진 것은 1922년 무렵이다. 청룡초등학교와 뿌리가 같은 부산 금정중학교(교장 현익채)는 1916년 2월 범어사 지방학림(중등)이 개설되면서 분리됐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근세 신학문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일제강점기 범어사 스님들의 원력을 되새길 수 있는 자료적 가치와 함께 근세 한국교육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청룡초등학교가 공개한 자료에는 사립명정학교와 명정보통학교 당시의 교장 명단과 졸업생 숫자가 적혀 있어, 당시 범어사와의 관계및 학교 규모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공립학교로 전환되기 이전 교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립명정학교 = 한혼해(韓混海, 1908년5월~1911년2월), 김용곡(金龍谷, 1911년3월~1920년1월), 이담해(李湛海, 1921년7월~1923년4월27일), 김경주(金敬注, 1923년4월28일~1927년1월9일) △명정보통학교 = 김경주(金敬注, 1927년1월10일~1930년3월31일), 김경산(金擎山, 1930년4월1일~1931년3월21일).

이 자료를 통해 명정학교가 ‘사립학교-보통학교-공립학교’로 전환된 시점이 정확히 드러났다. 청룡공립보통학교 인가를 받은 것은 1931년 4월 1일이다. 이때부터 명정학교는 공립으로 전환되었고, 범어사와 인연이 끝나게 된다.

지금부터 90여 년 전 촬영한 사립명정학교 2회.3회.5회 졸업사진은 당시 졸업생뿐 아니라, 범어사 스님들과 학교 교원들의 모습도 담겨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오성월(吳惺月). 김용곡.이담해.김경산 스님과 중앙불전(동국대 전신) 김경주 교장의 사진도 들어 있어 근세불교 연구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동국대 김종진(불교문화연구원) 교수는 “근대잡지에 이름만 오르내린 분들인데, 사진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지적했다.

사립명정학교는 모두 15회에 걸쳐 174명이 졸업했고, 명정보통학교는 4회에 걸쳐 141명이 졸업했다. 따라서 사립명정과 명정보통학교 시절 졸업한 학생은 모두 315명이다.

이번에 발굴된 졸업사진에 나오는 인물은 당시 명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사립명정학교 졸업생들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동래에서 자체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부산 금정중학교(교장 현익채)가 지난해 발간한 <금정 100년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사립명정 2회 = 강덕우, 김도원, 김상헌, 김정우, 김봉환, 차상명, 김봉휘 △사립명정 3회 = 권치근, 강혜전, 김정혁, 조성규, 김혜엽, 안경환, 김문도, 심도순, 정지근, 이재훈, 우정하, 송금조, 김상호 △사립명정5회 = 허병주, 황계종, 김동근, 배성안, 신영우, 양영수, 오상호, 김인만, 박영주, 허찬, 이달실, 정성은.

청룡초등학교는 최근 개교 100주년을 맞아 ‘역사자료실’을 구비하고,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비롯해 학교관련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하문석 교감은 “개교 100년을 맞아 학교 관련 사료를 찾다가, 우연히 이번 자료를 발굴하게 됐다”면서 허성찬 교장은 “1908년 개교한 역사 깊은 우리학교는 부산의 관문에 자리 잡은 학교”라면서 “이번 자료 발굴이 자라나는 청룡의 어린이들에게 100년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밝혔다. 
        
          

청룡초등학교는 …

범어사서 첫 출발한 백년학교

졸업 동문 1만7865명에 달해


부산 금정구 청룡동에 자리한 청룡초등학교는 1908년 5월 1일 범어사 금어암에서 사립 명정학교(4년제)로 문을 열어 올해 개교 100년을 맞이했다. 1927년 1월 사립 명정 보통학교 (6년제)로 이름을 바꾸고, 1931년 5월에는 공립 청룡국민학교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39개 학급에 1191명이 재학하고 있다. 2007년 2월 현재 76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졸업동문은 1만7865명에 이르고 있다.

허성찬 교장은 “100년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가고 싶은 학교.보내고 싶은 학교.머무르고 싶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교직원과 학생.학부모가 하나 되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졸업사진을 통해 만난 인물들…

             

성월스님 / 범어사 중건ㆍ학교설립 등 주도

이번에 발굴된 사진에는 1900년대 초기 범어사 주지를 지낸 오성월(1866~1943)스님의 모습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그동안 성월스님 사진은 몇 장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성월스님은 1866년 7월15일 울주군 온사면 우봉리에서 태어나 부산 범어사에서 보암정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스님은 금강산.오대산.설악산.묘향산.지리산 등을 순례하며 정진하고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서 오도(悟道)했다. 〈본지 2420호 16면 참조〉

범어사로 돌아온 스님은 1899년 금강암 선원을 비롯해 안양암.내원암.계명암.원효암 등에 선원을 개설하고, 1904년에는 만하스님을 모시고 금강계단을 설립하는 등 조선불교 정체성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님은 1909년 담해스님에 이어 범어사 총섭(總攝, 지금의 주지에 해당)으로 추대돼 가람을 중건하는 한편 명정학교(지금의 금정중.청룡초)학교를 설립하는 등 인재불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만해스님과 교류하며 조선독립과 불교왜색화 반대에 적극 나섰다.

범어사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의 면모를 갖춘 것도 성월스님이 주지로 있을 무렵이다. 범어사 주지를 3차례 역임한 스님은 1943년 8월9일 원적에 들었다. 이때 세수 78세. 법납 71세 였다.


용곡스님 /

용곡스님(?~?)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으며,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7년 명정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그해에 범어사 주지에 취임했다.

1918년에는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에 이어 위원장을 맡았다.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고, 3.1운동을 소요사건으로 비하하는 등 친일행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담해스님 /

담해(1860 ~1933년)스님은 울산에서 태어나 18세에 출가사문이 됐다. 은사는 연운(蓮雲)스님이다. 30세에 우봉(友峯)스님에게 법을 받았으며, 내외전에 두루 밝았다. 또 참선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범어사 총섭을 지냈다. 스님은 1933년 7월8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74세, 법납 56세였다. 남전스님이 찬(撰)하고 서(書)한 담해스님의 비는 범어사에 모셔져 있다.


김경주 /

1908년 동래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범어사 용곡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1921년 여름 도쿄조선불교청년회 전선순강단 일원으로 경남지역에서 순회을 강연 하다가 불온사상 선전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1923년 일본 도요 대학 졸업 후 명정학교 교장, 중앙불전 학감.교장, 오산불교학교장, 범어사 주지 등을 지냈다.

부산=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조선후기 이후 근세불교자료를 보관하고 계신 분들은 불교신문사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soolee@ibulgyo.com soolee87@naver.com



[불교신문 2442호/ 7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