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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문경 대승사 미륵암터 마애여래좌상

 

문경 대승사 미륵암터 마애여래좌상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며 중창불사한 孝心 담겨

봄이 왔건만 꽃을 구경도 못한 안타까움 때문인가. 간밤 꿈속에 꽃들이 한가롭게 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잠을 깬 새벽, 문득 짐을 챙겨 나선 곳은 꽃들이 불같이 피었다는 남도의 섬진강변이 아니라 첩첩산골 문경이었다. 기억의 언저리에 묻어있는 먼지를 털어내자 그곳 사불산(四佛山) 기슭의 부처님 머리에 꽃이 피었던 것이 선연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겨울가고 봄이 왔으니 부처님 머리위에 핀 꽃 또한 생기를 얻었을 터, 노란 꽃을 한 움큼이나 매단 채 시골집 담에 기대선 산수유나무를 지나쳐 휑하니 산으로 올랐다.

<머리 위에는 천개를 덮고 소발의 머리에 꽃을 꽂으신 부처님이다. 이곳에 미륵암이 있었다고 전하며 지극한 효성을 지녔던 백진 이라는 사람이 1385년 중창불사를 할 때에 이미 마애불은 있었다고 한다.>

대승사(大乘寺) 못미처 갈림길에 자동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윤필암(潤筆菴)과 묘적암(妙寂菴)으로 향하는 길은 어쩌면 이리도 고요할 수 있는가. 세속의 번잡한 소리가 사라지고 오로지 적막하여 결이 고운 흰 무명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윤필암을 오른쪽으로 두고 묘적암 길로 들어서서 백 걸음이나 떼었을까, 아! 아직 햇살 비쳐들지 않은 바위에 부처님이 계셨다. 향 한 자루 사르고 윤필암 사불전 뒤의 삼층석탑에 비쳐 든 해를 바라보며 부처님을 등지고 앉았다.

그때 부터였다. 정오가 되어 다시 일어날 때 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 말이다. 부처님에게 해가 비쳐들 때 사진 한 장 찍은 것 말고는 다섯 시간을 앉아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는 정적은 오체투지로 몸을 날려 뛰어들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으며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새들의 지저귐뿐이었다. 딱따구리가 썩은 나무를 쪼는 소리는 마치 목탁소리와도 같았으며, 분주한 몸놀림으로 이 나무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재재 거리는 박새들의 지저귐은 아직 어린 동자승들이 경을 외는 것 같았다.

방치된 신라 미륵암 옛터

효자 ‘백진’이 복원 발원

혜안.승부스님과 힘모아

농사 지으며 도량 일으켜

지금은 흔적 조차 안남아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내 눈길은 부처님을 향하기보다 그들을 쫓고 있었으니 들고 갔던 공부마저도 팽개치고 말았다. 선(禪)도 아니요, 관(觀)도 아니었던 그 시간, 그러나 허망지만은 않았다. 비록 눈길은 새들의 아름다운 몸짓을 쫓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부처님보다 더 크게 부모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말이다. 부처님 앞에 와서 그는 우러르지 않고 등지고 앉은 채 난데없이 부모님 생각에 젖어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여말선초의 문인이었던 양촌(陽村) 권근(1352~1409)이 지은 ‘사불산 미륵암 중창기’때문이었다. 그는 글에서 산 정상에 밑 둥이 땅에 박히지 않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사면에 불상을 새겨 사불산이라 이르고, 그 중간에 법왕봉(法王峯)이 있는데, 남쪽 절벽에 자씨(慈氏)의 얼굴을 새긴 바위가 있으며 그 곁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 미륵암이라고 했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이다. 비록 암자는 스러져 그 흔적조차 가뭇없지만 자씨란 곧 미륵보살을 뜻하는 것이니 지금 내가 등지고 앉은 부처님이 당시에는 미륵 부처님으로 섬김을 받았던 것이다.

기문에 따르면 미륵암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폐허가 된 암자를 1385년 새로이 중창을 시작할 무렵에도 마애불의 모습은 완연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가 이곳에서 부모님을 떠 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암자의 중창을 발원한 백진(白瑨)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경북 영해(寧海)에서 살았으나 1383년 봄, 왜구의 침탈을 견디지 못하고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어머니를 등에 업고 이산 저 고을을 떠돌다 이윽고 다다른 곳이 사불산 기슭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고행 길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병을 얻어 그만 이듬해에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았을까.

어느 날, 백진은 산에서 만난 스님에게 눈물로 하소연하기를 낮이나 밤이나 근심하며 부모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정결한 집을 마련하여 명복을 빌며 은덕을 갚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스님은 “절을 새로 짓는 것은 국가에서 정한 금법이 있어 어렵고, 이 산에 신라 때부터 있었던 미륵암의 옛터가 오랫동안 묵어 있으니 새로 중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백진은 눈물을 거두고 쾌히 마음을 열고 서둘러 미륵암 옛 터에 가보았다. 골짜기가 맑고 깊숙한가 하면 경내의 지형이 시원스러우며, 자씨 불상이 완연할 뿐 아니라 옛터 또한 그대로 남아 있어 비로소 불사를 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윽고 백진과 비구인 혜안(惠眼)ㆍ승부(勝孚) 스님이 힘을 합하고 사람을 모았는가 하면 일 하는 사람들이 굶지 않을까 하여 한쪽에서는 농사를 지어가며 중창불사를 일으켰는데 그 때가 1385년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387년에 불사가 끝났는데 집이 모두 4채에 2중 서까래를 얹고 대청과 부엌도 마련해 아쉬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청을 하지 못해 마음에 걸렸으나 어느 떠돌이 스님이 단청하는 물감을 지니고 있어 그에게 부탁하여 단청까지 마치니 비로소 절집으로 모양이 갖추어졌다. 그 후, 지운(志雲)스님의 도움으로 〈묘법연화경〉 1부와 〈부모은중경〉 3권을 인출하여 비치하고 이어 낙성식을 하며 경을 외우니 그 해는 1388년 정월이었다.

백진은 다음 해인 1389년에도 경을 외며 공을 들이고 난 다음 영해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그해 12월에 양촌이 영해로 귀양을 가서 백진을 만났는데 판사(判事)였던 그가 양촌을 맞아 기문을 부탁했으니 말이다. 양촌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쾌히 기문을 써 주었으며 “아아! 세속의 어버이 섬기는 사람들은 구차히 초상 치르는 데만 힘쓸 뿐인데, 백공은 능히 예절을 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왜구를 피하느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와중에도, 절을 중창하고 경문을 인출하여 영구히 한없는 복을 도모하였으니, 윗사람에게 예절을 다하고 제사 때 정성을 다하는 효성이 남들보다 한층 더하다 하겠다.” 라며 끝을 맺었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의 상호.>

아! 이 일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쏘냐. 백진의 말마따나 매양 고생하시며 낳아 기르신 은덕을 생각하면 하늘과 같아 보답할 길이 없는 것이 어버이 은혜 아니던가. 내가 말을 잃고 또 부처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새들의 몸짓만을 쫓으며 앉아 있었던 것은 백진의 마음에 비하면 나의 마음은 모래 한 알 만큼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서 말 여덟 되의 응혈(凝血)을 흘리며 낳고, 여덟 섬 네 말의 혈유(血乳)를 먹이며 키운 어머니를 떠 올리면 정녕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옛글에 허물을 알면 고친다고 했거늘 언제쯤이나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허물을 고칠 수 있을까. 아무리 “자기의 허물을 아는 것이 남의 착한 일을 듣는 것보다 나으므로, 오직 허물을 아는 것이 절실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하고, 허물을 고치는 것이 빠르지 못한 것은 걱정할 것 없다.(知己之過 勝於聞人之善 故惟患知過之不切 不患改之之不敏)”고 하지만 이미 허물을 깨달은 지 오래이거늘 늘 이 모양이니 어찌 해야 옳단 말인가. 언제쯤이면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또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을 백 천 번 돌더라도 갚을 수 없다는 그 가없는 은혜의 한 자락만이라도 덮을 수 있을 지 난감하기만 한 것이다.

그 때문인가. 부처님 앞으로 뻗어 나온 나무에 둥지를 튼 작은 박새가 이제 곧 태어 날 새끼를 위한 것인지 마른 풀을 물고 돌아가는 모습이 새삼스럽기만 했다. 불현듯 떨어져 사는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누고, 지누가, 어데고” 당신은 언제나 그랬다. 전화만 드리면 내가 어디 있는 지 그것부터 물었던 것이다. “문경에 와 있는데 별 일 없지요?” “어데, 문경, 아이고 야야, 그래 멀리 또 뭐 하로 갔나. 그도 볼 일이 있더나. 날은 안 춥나, 오늘 바람이 씨게 불던데, 오늘도 산 속에 있나” 늘 이런 식이다. 어머니는 내가 묻는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당신 걱정부터 내 놓으시곤 했다. 그나마 내가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면 두어 번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겨우 가능 했으니 나는 예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몰랐다.

그것은 이 세상 누구도 가지지 못하는 어머니만이 베풀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어머님 하시는 대로 마냥 듣고만 있다가 내 할 말은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고 나서 언뜻 비추는 것으로 통화를 마치곤 하는 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다. 잠시 전해야 할 말이 있을 때라도 어머님이 삼십 분을 말씀 하시면 그대로 듣고, 한 시간을 말씀 하셔도 그대로 들을 뿐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운전 조심 하라는 것에서부터 산길 조심하라는 또 아직 날씨가 추우니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소소한 걱정을 이십 분 남짓이나 들었다.

그리곤 어머니가 묻는다. “그래 무슨 일이고?” “그냥, 우째 잘 계시나 하고 엄마 목소리 한 번 들을라고 했어요.”라고 하자 “야가 싱겁기는, 그래 다른 일 있는 건 아이제, 그라마 고마 끊어라. 전화비 마이 나온다.”하시며 먼저 끊으셨다. 그러나 나는 안다. 비록 화상전화는 아니지만 전화기 너머 짐작되는 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어렸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머니란 그런 분 아니겠는가. 부처님 뵈러 와서 엉뚱한 소리만 한다고 하겠지만 부처님이 어디 부처님이기만 하겠는가. 그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하며 또한 스승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그것들을 모두 끌어안고 이끌며 또 넘어가지 못한다면 어찌 견성성불 네 글자가 당키나 하겠는가. 생각을 그치고 일어서자 딱따구리가 다시 나무를 쪼고 박새들이 경을 외는 소리가 숲 속에 가득 차 있었다.  

기록문학가

 

■ 미륵암터 마애여래좌상 특징

봉암사 백운대 마애불과 비슷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은 유형문화재 제 239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승사의 산내 암자인 윤필암과 묘적암 사이에 있다. 양촌 권근의 기문에 따르면 마애불이 있던 자리에 미륵암이 있었으며 미륵암 중창불사를 하던 1385년에 이미 마애불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으니 그로 미루어 조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마애거불(磨崖巨佛)은 고려시대에 중점적으로 조성되었으며 같은 문경 지방에서는 봉암사의 백운대 마애보살상(유형문화재 제12호)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과 유사한 양식의 봉암사 백운대 마애보살상.>

미륵암의 존재와 더불어 마애불이 있었으니 미륵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마애불의 전체 높이는 6m에 이르고 아래 연화대좌의 너비는 3.7m에 달한다. 마애불을 처음 대하면서 놀라는 것은 머리에 뿔처럼 나 있는 연꽃이다. 이는 다른 마애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한 양식이지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 명쾌한 해석을 내리기는 힘들다.

또한 머리 위에는 별석을 사용하여 천개(天蓋)를만들어 비나 눈으로부터 상호가 상하는 것을 막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서울 구기동의 승가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215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목의 삼도는 뚜렷하다. 광배는 상체 전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세 겹의 두광 주위는 화염문이 표현되었으나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으니 눈여겨봐야 한다.

마애불에서 가까운 묘적암은 나옹스님이 출가한 곳이며 성철 스님이 가시철망을 두르고 정진한 곳이기도 하다.

 

■ 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나들목 나와야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나들목으로 나가서 3번국도 안동방향으로 향한다. 진남 휴게소를 지나 불정1교, 견탄리에서 34번 국도로 갈아타고 성보예술촌을 지나 좌회전한다. 이곳부터 대승사와 김룡사 이정표가 갈림길 마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마애불은 대승사로 오르다가 만나는 윤필암 바로 곁에 있으며 대승사와 윤필암 갈림길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문경새재 나들목에서 대략 30km가 조금 넘는 거리이다.

[불교신문 2313호/ 3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