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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문경 윤필암 사불바위

 

문경 윤필암 사불바위

하늘을 닫집 삼고 땅을 법당 마루 삼은 부처님

 

▲ 가장 뚜렷한 남면의 부처님.

 

◀ 사불산 사불바위. 네 면에 모두 부처님이 새겨졌지만 조각은 깨지고 문드러져 선명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587년,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는 부처님이다.

 

윤필암 전경. 가장 왼쪽 뒤의 전각이 사불전이며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사불바위를 우러른다.

 

“신라 진평왕 9년 하늘서 내려와” 삼국유사 기록

‘허공’에 우뚝 솟은 바위로 불국토 화엄세계 표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윤필암(潤筆菴)으로 향하는 길에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까짓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껴입은 옷조차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 시나브로 봄이 깊은 것이다. 계절의 속도는 언제나 생각보다 빨라서 일주일 만에 다시 걷는 길이건만 지난 주에 보지 못하던 색깔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양지 뜸에서 곧 터질 듯 부풀어 있던 진달래가 봄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그를 살포시 어루만지며 가고 있는 곳은 윤필암에서 빤히 쳐다보이는 사불(四佛)바위이다.

십오 분이나 올랐을까. 발아래에 와편들이 밟히는가 싶더니 숨이 가빠올 무렵 붉은 동살을 듬뿍 머금은 돌기둥이 나타났다. 먼 곳에선 그저 바위 덩어리일 뿐이었다. 거칠 것 없는 허공에 우뚝 솟은 저 바위가 바로 부처님이 새겨진 사불바위라니…. 가까이 다가가자 어렴풋이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뚜렷한 것은 없었다. 깨지고 문드러져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도무지 부처님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부처님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바위를 낱낱이 뜯어보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일지라도 가까이에서 봐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멀리서 그 존재감을 느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무엇 있겠는가. 더러는 바로 앞에서 우러러야 할 것이지만 또 무애의 허공일지라도 존재의 실상을 마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마음 속에 이미 부처님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인들 또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의 바위가 부처님이 아닌 것은 아닐 터, 동살이 밝아오는 동쪽을 향해 앉았다.

이처럼 하늘을 닫집 삼고 땅을 법당 마루 삼은 도량에 앉을 때마다 깨닫는다. 왜 진즉 이 시간의 아름다움을 몰랐을까 하고 말이다. 산다는 것이 늘 어제를 깨우치는 나날이긴 하지만 이처럼 새벽 첫 햇살의 맑고 부드러우며 뚜렷한 힘의 귀함을 알려주신 분은 부처님이다. 폐사지에로의 순례를 이어갈 때 비로소 이 순간이 주는 환희로움을 알게 되었으니 부처님이 아니었다면 어찌 깨달을 수가 있었겠는가. 막막한 삶의 어둠 속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떨고 있을 때에도, 세상을 향한 막연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극에 달했을 때이거나 채 가라앉지 않은 흥분으로 들떠 있을 때에도 나는 새벽 속을 걷거나 앉아 있었고, 그 곁에는 언제나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이 계셨다.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동안 수차례 이곳에 올랐건만 동 틀 무렵에는 처음 올랐으니 눈은 환희 떠지고 마음은 활짝 열렸다. 거칠 것 없이 펼쳐진 뭇 능선들의 유장함에 흔들린 눈길은 능선에 불거진 바위가 잡아주고, 생기라곤 없는 고사목에 머무는 눈길은 그 아래 피어난 보랏빛 진달래가 풀어주며, 흐트러진 생각은 뚜렷하지 않아 오히려 그윽한 네 분의 부처님이 다 잡아 주니 이만한 곳 또 어디 있겠는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불바위는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 “죽령 동쪽 백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진평왕 9년 정미(丁未)에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일대석(一大石)이 붉은 비단에 싸인 채 하늘로부터 산정(山頂)으로 떨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원문에는 진평왕 9년, 갑신(甲申)이라고 되어 있지만 진평왕 9년은 587년으로 정미년이다.

그 소문을 들은 왕이 그곳으로 찾아가니 곧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곳이다. 왕은 이 돌에 예배를 올리고 바위 곁에 절을 창건했으니 그 절이 대승사(大乘寺)다. 왕은 이어 연경(蓮經), 곧 〈법화경〉을 외는 스님을 청하여 주지로 삼았으며 산 이름을 역덕산(亦德山)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 불렀다. 또 주지로 청했던 스님이 열반하여 다비를 치르고 나자 무덤 위에 연꽃이 돋았다고 한다. 아, 그것인가. 그렇다. 이제야 지난주에 찾아갔던 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의 머리에 왜 연꽃이 피었는지 어렴풋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곧 〈법화경〉을 잘 외던 대승사 주지 스님의 이야기를 형상화 시킨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렇듯 하늘에서 내려 온 사불바위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땅에서 솟아 나온 사불바위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그것은 경주 동천동 소금강산 기슭의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불바위다. 절 이름 그대로 땅에서 부처를 파냈다는 뜻이니 이곳과는 전혀 반대인 셈이다. 굴불사의 사불바위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의 35대 왕인 경덕왕이 백률사로 나들이를 갔는데 산 아래에 닿으니 땅 속에서 염불 외는 소리가 났다. 그리하여 그곳을 파 보게 했더니 지금의 사불바위가 있어 그 곁에 굴불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솟은 부처바위들이 하필이면 사불바위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굴불사의 사불바위를 캐내게 한 경덕왕의 재위 기간은 742~764년이므로 진평왕 재위 보다 160여년 뒤이긴 하지만 말이다. 더구나 예산 화전리의 사불바위 같은 경우는 백제의 것으로 이곳의 사불바위 보다 그 조성시기가 수십 년 정도 앞선다는 조사보고가 있다. 그러고 보면 대개 이렇듯 독립적인 사불바위의 조성 시기는 비교적 마애불의 조성이 시작된 초기에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인 셈이다.

하지만 뚜렷하게 사면에 부처님을 새긴 까닭이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신라에서 조성된 사불바위는 신라 자체가 불국토(佛國土)라는 개념이 전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원시시대의 산악숭배신앙에 이어지는 오대신앙은 방위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이며 사불바위 또한 방위개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오대신앙은 산봉우리 네 곳에 모신 부처님에 더해 가운데에도 부처님을 모셨지만 사불바위는 그곳이 놓이는 그 땅 자체를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보는 것이다. 곧, 불국토이므로 그 곳에는 언제나 부처님이 상주하고 계시다는 전제 아래 바위의 네 면에 부처님을 새겼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는 것이다.

이는 그 이후 나타나는 석탑의 몸돌에 조성되는 사방불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속초 진전사지의 삼층석탑을 예로 보라. 탑의 몸돌에는 각각 눈에 보이는 네 면에만 여래를 조성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언제나 또 다른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던가. 그는 곧 불사리인 셈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은 흔히 말하는 사방불(四方佛)이지만 되짚어 보면 모두 다섯 분의 부처님을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곧, 탑심(塔心)에 존재하는 부처님과 함께 불국토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지금 내 눈앞에 놓여있는 사불바위 또한 이미 이 땅에 상주하고 계신 부처님과 함께 화엄적인 불국토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어느덧 햇살은 남쪽에 계신 부처님을 비추고 있었다. 네 분의 부처님 중 가장 형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그마저도 상호의 왼쪽 귀 부분만 조각이 남았을 뿐이다. 그 처연한 모습의 부처님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탑처럼 서 있으니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삼배를 올리고 사불바위를 끌어안고 빙그르르 돌자 윤필암과 묘적암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 왔다.

목은(牧隱) 이색이 지은 〈윤필암기(潤筆菴記)〉에 따르면 윤필암은 스님이었던 각관(覺寬)과 찬성(贊成)이었던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가 힘을 합해 지었다고 한다. 그들이 절을 완성하고 자신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기문을 지은 때는 1380년 8월 초하루였다. 그러나 이때 절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중창불사였을 수도 있다. 진평왕이 사불바위를 참배하러 들렀을 때 지금의 윤필암 자리에서 바라보며 예불을 올렸다고 하니 그곳이 바로 사불전(四佛殿) 뒤의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니 이미 절이 있었으나 황폐해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인지 새로이 창건한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또 목은은 사불산을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지공(指空)스님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진평왕 당시 역덕산이라고 불리던 산이 무슨 연유로 공덕산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나는 들으니 공덕산이 대원(大院) 동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봉 위에 큰 돌이 네 갈래로 갈라졌고, 높이가 모두 넉 자 남짓한데, 마치 부처님의 모양 같으므로 복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떼를 지어 몰려와서 기도하기 때문에, 이 산을 ‘사불산(四佛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며 사불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다.

정오가 지나고 3시가 가깝도록 머물면서 네 분의 부처님 모두에게 햇빛에 비쳐들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가진 것 없으니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네 분 부처님에게 무량한 햇살 공양이라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기록문학가

 

땅에서 캐낸 경주 굴불사 사불바위.

 

■ 언제 조성됐나

조각 기법은 ‘백제’ … 문화재 미지정 안타까워

 

윤필암 사불바위는 〈삼국유사〉에 그 조성연대가 뚜렷하게 밝혀진 사방불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조각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미술사적으로 그 확인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조차 되지 않아 안타깝다. 보물 제794호로 지정된 예산 화전리의 사불바위는 아직 그 조성 연대가 뚜렷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조각수법으로 봐서 백제의 것으로 조성연대는 6세기 초반으로 보는 견해가 발표되기도 했다.

신라의 경우 사불바위에 조성한 부처상들은 대개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 미륵보살 그리고 약사여래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이를 따르지는 않았다. 또한 약사여래 신앙은 신라 최대의 학승이라고 불리는 원효스님의 저술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없으니 대략 그가 생존했던 686년까지는 약사여래신앙이 신라에서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분황사에 약사여래상이 봉안된 것이 경덕왕 14년인 755년이고 보면 그 무렵부터 약사여래를 모시는 것이 일반화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경덕왕 재위기간인 742~764년에 발견된 굴불사 사불바위의 경우 약사여래가 뚜렷하고 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하는 경주 남산 칠불암의 사방불 또한 약사여래가 뚜렷하니 말이다. 이는 대개 동쪽에 약사, 남쪽에 미륵, 서쪽에 아미타 그리고 북쪽에 석가여래를 모셨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러한 사불은 불사리를 중심으로 하여 화엄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가는 길

 

3번 국도 안동 방향

34번 국도로 갈아타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나들목으로 나가서 3번국도 안동방향으로 향한다. 진남휴게소를 지나 불정1교, 견탄리에서 34번 국도로 갈아타고 성보예술촌을 지나 좌회전한다. 이곳부터 대승사와 김룡사 이정표가 갈림길 마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사불바위는 윤필암 마당에 자동차를 세우고 공중전화 박스 건너에 보면 입산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오솔길이 보인다. 그곳으로 15분 남짓 오르면 사불바위에 다다른다. 오르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무조건 왼쪽으로 향하면 된다.

 

[불교신문 2315호/ 4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