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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 입상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 입상

상호 잃은 사연 숨긴채 두손 모드고 사바세계 응시



공민왕 피난길에 들린 왕유동 위치

고려시대 조성 된 마애보살상 추정

구미시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닮아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선물이다. 자연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늘 그런 생각으로 길을 나서지만 뜻밖의 선물을 받고나면 그 설렘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 때문인가. 길 나섰다가 돌아 온지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기분이 좋다. 경북 영주로 향하던 날, 이른 새벽부터 여주 신륵사의 다층전탑 아래 강월헌(江月軒)을 받치고 있는 바위인 동대(東臺)이자 나옹화상의 다비장으로 알려진 곳에서 동살을 즐기고 있었다. 무심한 눈길로 강물을 바라보다 돌아 선 나는 퍼뜩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십 번을 다녔던 곳이건만 그동안 보지 못한 조각이 눈에 띈 것이다. 그것은 바위에 새겨진 활짝 웃는 돼지의 얼굴이었다. 비록 그 생김은 근래에 새긴 것 같았지만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을 만큼 조각은 닳아 있었다. 그곳이 나옹화상의 다비장이며 신륵사의 경내이기는 하지만 또한 나루터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곳, 조포나루를 통해야만 신륵사로 오갈 수 있었으니 마애돼지가 새겨진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강동리 마애보살 입상은 머리를 잃었으며 손에는 지물을 들고 있어 보살상으로 본다. 보살상의 왼쪽 어깨부분에는 따로 네 개의 감실부처를 모신 것이 독특하다.



나루터마다 있었던 뱃고사의 제물을 아예 바위에 새긴 것은 아닐지 궁금했다. 신륵사는 나옹화상의 다비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민간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돼지해의 정초에 나라 안에 하나 밖에 없을 마애돼지상을 선물로 받았으니 고민은 뒤로 미루어 둘 뿐, 그 아니 마음이 흐뭇했겠는가.

그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달려 간 곳은 경북 영주의 강동리 왕유동(王留洞) 왕머리 마을이었다. 영주에서도 외진 곳이긴 하지만 마을 이름 그대로 왕이 머물다 간 곳이며 이 마을에 부처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마애보살 입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상북도문화재연구소가 2002년에 조사보고서를 낼 정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서붓서붓 걷는 걸음이 들떠 있었다. 영주이긴 하지만 안동의 북후면으로 들어서서 두산리 말상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곧 왕유동이다. 이제 막 농사철이 시작되려는 것인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들에 나가 산촌은 고요하기만 했다.

두리번거리며 구경삼아 마을을 거닐다 만난 촌로에게 부처바위를 묻자 “아, 부치바우는 저 울로 가서 오른쪽으로 길 따라 상구 가마 왼짝 편에 있시더”라고 한다. 자동차는 마을 경로당에 세워두고 걸었다. 사과나무가 지천인 작은 고개 하나를 지나자 채 10분도 걷지 않아 왼쪽에 부처바위가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구비를 돌아들자 아! 그곳에 있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서 계신 보살상이 말이다. 그러나 아직 볕이 들지 않아 두루뭉술할 뿐 그 세세한 모습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멀리서 사과나무를 손질하러 나온 촌부들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무작정 그곳으로 갔다. 그리곤 부처님에 대해서 말을 던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손사래를 칠 뿐 일손을 놓지 않았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웃대 어른들로부터도 부처님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것이 없고 다만 마을에 머물다 간 왕이 고려의 공민왕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라고 한다. 오후 2시경, 다시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이윽고 볕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부터 비쳐드는 볕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두 손만 선명하게 보일 뿐 상호는 간 곳이 없었다.

목이 잘려 머리를 잃어버린 단두불(斷頭佛)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개 크지 않은 불상에서 보았을 뿐 이토록 거대한 불상에서 머리가 없는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더구나 눈앞에 베풀어져 있는 부처님은 마애불이 아닌가. 흔치는 않지만 더러 새기다만 부처님의 모습을 대할 수는 있다. 앞 서 연재했던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에는 머리 부분만 새기다만 부처님이 있으며 남한강 가에 새겨진 여주의 계신리 마애여래입상 곁에도 눈과 코만 새기다 만 부처님이 계신다. 또 영주의 두월리 마애불과 같은 경우는 상반신만 있을 뿐 하반신은 새겨져 있지 않다. 그러니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인 것이다.

더구나 6m에 이르는 거불(巨佛)에서는 머리를 조성하지 않은 예를 찾을 수 없으니 더욱 궁금증만 더했다. 기어코 바위를 에돌아 위로 올라갔다. 혹여 이런 식의 마애거불이 유행하던 시기인 고려시대에 만든 다른 거불들처럼 몸은 바위벽에 마애로 새기고 머리는 다른 돌로 만들어 올리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뒤로 올라서서 삼도가 선명한 목을 바라봐도 석연치 않았다. 잘린 부분에는 다른 돌을 올릴 때 미끄러지지 않게 정으로 쪼아 놓은 자국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바위 전체가 한 면으로 보이지만 막상 위에 올라가서 보니 조각이 되어 있는 부분과 사라진 머리 부분의 뒤는 서로 다른 면이었다.

곧 전체 큰 바위에서 앞면에 지금 남아 있는 조각이 새겨진 것이고 머리가 있어야 하는 부분은 그 뒤로 다른 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설령 머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돌이었을 것이고 두툼한 바위에 고부조로 새겼거나 아예 환조였을 가능성이 크지 싶었다. 왼쪽 어깨부분에서부터 가는 원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으니 그것은 두광이 분명했다. 대개 두광의 지름을 계산해 그려보면 계단식으로 표현 된 삼도가 남아 있는 목이 원 중심의 아래 부분이 된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잘려나간 목 부분이 정으로 쪼아져 있는 것이 굳이 다른 돌을 포개어 올릴 때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머리 부분을 조성하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왼쪽 어깨로부터 새겨져 있는 4구의 감실부처님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바위 면에 정사각형의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셔두었다. 비록 두 곳의 감실 안에만 부처님의 모습일 뿐 나머지 둘은 새기다 만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예 또한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것이다. 물론 석굴사원인 경주의 석굴암이나 충주의 미륵리 절터와 같은 곳처럼 본존불을 둘러 싼 석굴에 감실을 조성하고 석굴 안에 따로 작은 부처님이나 보살상을 조성한 경우는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마애로 되어 있는 경우는 없으니 특이하다. 하지만 한 눈에도 감실속의 부처와 마애보살과는 조성연대가 다르다는 것이 눈에 띈다. 사진설명: 보살상 보다는 후대에 조성된 듯한 감실부처상.



그러니 누군가가 마애보살입상의 존재를 알고 난 다음 이곳에 덧대어 부처님 세계의 조성을 꾀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감실 속의 부처님들은 그 표현으로 미루어 조성시기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조선시대를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1시간여 시간이 지나자 햇살은 더욱 강하게 비쳐들어 목으로부터 발아래까지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흥미로운 것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 중 유난한 것은 발가락이었다. 가슴부분과 손까지만 부조로 새기고 통견의 법의는 선각으로 새겼지만 다시 발가락은 부조로 새겼다. 더구나 신발을 신지 않은 발가락은 거대한 몸에 비해 앙증맞기까지 했으니 슬그머니 웃음이 머금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보살입상은 선각으로 새긴 구름 위에 놓인 연화좌를 밟고 서 있는 것이 된다.

고개를 위로 돌려 우러르자 오른쪽 팔꿈치 부분부터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가슴을 향하고 오른손은 손등을 가슴을 향하여 외장(外掌)한 수인은 이 마애불을 보살상으로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손에 지물(持物)을 들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보고서에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막대와 같은 것이 왼손 새끼손가락 위로 지나가고 그 끝에 연꽃이 달려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쳐다보고 있어도 지물을 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연봉이 달린 가지라고는 보이지 않으니 난감하기만 했다. 그 가지 끝에 달린 장식은 주장자나 석장에 달린 방울과도 같아 보였으며 왼손 새끼손가락 바로 위에 8자형 매듭이 지어 진 것이 나뭇가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보고서에는 거론조차 되지 않은 오른손 끝에서 불꽃 무늬와 같은 것이 보이는 것은 무슨 일일까. 검지의 마지막 마디는 손등과 붙은 쪽의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만큼 굵었으며 그 끝에는 세 가닥의 불길 무늬가 위로 뻗으면서 가운데로 모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손가락의 마지막 마디가 아니라 오히려 화염문(火焰文)에 둘러싸인 보주이거나 연봉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 보살입상의 손가락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의 그것들처럼 세련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설령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불상 조성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에 비해 유독 손가락의 표현이 저토록 어긋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 있다.

오후5시가 가까워 오자 그늘이 드리워지고 선명하게 보이던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의 꿈인 양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해가 저물자 골짜기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찬 기운이 엄습했으며 보살입상의 잃어버린 머리의 행방을 가늠해 보던 눈길 또한 거두었다. 그러나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한 까닭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어진 이곳을 찾으면서 들뜬 마음에 향 한 자루 사르지 못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봄꽃들의 헌화공양 받을 것이니 그로 위안 삼으며 종종 걸음을 놓았다. 기록문학가

여주 신륵사 경내 나루터에 있는 ‘마애돼지’.

 

 

특징

정사각형 감실 조성
네분의 부처님 모셔

영주시 평은면 강동1리 왕유마을에 있는 마애보살 입상은 경북 문화재자료 제474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왕유마을은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을 가던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북문화재연구소의 2002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보살입상의 크기는 발아래 구름무늬로부터 목의 절단면까지가 426cm에 이르고 구름무늬 끝에서 두광의 끝까지는 576cm에 달한다. 왼쪽 어깨와 평행하게 만들어진 감실은 모두 네 개이며 크기는 대략 30cm안팎의 사각형이다. 그 중 두 곳에만 좌상을 새겼으며 두 번째의 감실부처는 눈과 코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또한 오른쪽 아랫부분에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두 자인지 세 자인지 판독이 쉽지 않지만 보고서에는 ‘부행(釜行)’ 혹은 ‘전행(全行)’으로 판독했으며 마애불 조성에 관여한 사람의 인명일 것으로 추정했다. 목이 없는 것에 대해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마애불의 조성 끝머리에 머리 부분만 남겨 놓았을 때 “여기는 불상을 이룩할 데가 못되니 안동 땅에 가서 자리를 찾으라.” 하여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 이천동 석불상인 제비원 불상을 조성했다고 하며,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마애보살 입상의 머리를 떼어다 이천동 석불상의 머리를 대신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그러나 이곳 마애보살 입상의 조성 형식을 가늠해 보기에 이천동 석불입상이나 봉화 봉성리의 석조여래 입상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거리상으로도 이천동 까지는 30분, 봉성리까지는 1시간 남짓하게 걸릴 뿐이니 같은 지역의 비슷한 양식으로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보물 제1122호인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과도 닮았다.



가는 길

안동시 북후면으로 가는 것이 수월하다. 풍기에서 5번 국도를 따라 북후면에 닿은 후 928번 도로를 따라 두산리 방향으로 6km정도 들어가면 말상고개에 다다르고 고갯마루가 영주시 평은면 강동1리 왕유마을과 경계이다. 고개를 300m쯤 내려가면 왼쪽으로 노인회관이 있으며 회관을 지나 100m가량 가다가 왼쪽으로 들어가는 시멘트 농로를 따라 700m 남짓이면 왼쪽에 마애보살 입상이 있다. 북후면소재지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안동 시내방향으로 20분 남짓이면 이천동 석불상을 만날 수 있다.



[불교신문 2307호/ 3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