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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봉화 청량사

오색 단풍에 안긴 청량사 보는 순간 내가 부처

문수보살이 상주한 산이라 들끓던 번뇌가 일시에 
없어진 시원함 때문일까? 총명수 덕일까? 예부터 
이 산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었거나 
대학자나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이 그러했다. 특히 퇴계는 이 산이 너무 좋아 
오가산(吾家山), 자기네 산이라 자랑하기도 했다…

청량산 육육봉 단풍은 차별된 현상이 서로 걸림 없이 
펼쳐지는 사사무애 법계를 연출하는 비로자나불임을 
느낄 수 있다. 살면서 번뇌와 욕심에 치일 때는 
단풍잎 떠내려 오는 물길 따라 청량사를 찾아가자.


경북 봉화 청량사 전경. 청량산 육육봉 단풍은 차별된 현상이 서로 걸림 없이 펼쳐지는 사사무애 법계를 연출하는 비로자나불임을 느낄 수 있다.


가을날 푸른 하늘 사이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단풍은 삶의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좋다. 인간이 살아온 일생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단풍은 ‘황혼’이다. 가을 단풍은 자식들 잘 키운 노부부처럼 아름답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붉게 물들이는 청량사(淸凉寺) 단풍은 사바가 곧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임을 알려 주려는 듯 화려하다. 법신(法身)은 중생들이 보고 느끼며 감동을 받았을 때 바로 그 자체가 된다. 고려 때 문신 박효수는 청량사를 두고 말하길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 먼 마을의 단풍이 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라 하여 청량사의 풍광에 감탄하였다. 

청량산은 원래 중국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을 말하는데, 혹서기(酷暑期)에도 더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청량산이라는 별칭이 생겼다고 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청량(淸凉)’이라는 것은 불선(不善)의 원인이 되는 혼침(昏沈)과 탁함을 없앴기 때문에 ‘맑다(淸)’고 했고, 생사의 결과인 뜨거운 고뇌를 떠났으므로 ‘시원하다(凉)’고 했다. 특히 <화엄경>에 “문수보살은 청량산에서 설법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시현(示現)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푸른 하늘 사이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청량산 단풍은 삶의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좋다.


문수보살 ‘시현’ 대학자도 욕심내는 산

청량산(870m)은 태백산에서 남으로 흘러 내려와 예안강(禮安江) 옆에 우뚝 솟아 있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두어 봉우리만 보일 뿐 사람들은 그 절경을 알지 못한다. 강을 건너 골짜기 안에 들어가면 사면의 석벽이 만 길이나 되는 높이로 빙 둘러 있는 절경을 만나는데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산은 열두 봉우리로, 옛날 연대사(蓮臺寺) 자리였던 가운데 봉우리에는 5층 불탑이 우뚝 솟아 있다. 문수보살이 상주한 산이라 들끓던 번뇌가 일시에 없어진 시원함 때문일까? 총명수(聰明水) 덕일까? 예부터 이 산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었거나 대학자 나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원효와 의상, 김생이 그러했고 최치원이 그러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이 산이 너무 좋아 오가산(吾家山)이라 부르며 자기네 산이라 자랑하기도 하였다. 대학자도 감히 욕심을 내고 싶은 산이 청량산이다. 

원래 청량산과 주변 열두 봉우리는 불교적인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유학자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산봉우리 이름을 거의 ‘유가(儒家) 스타일’로 바꿔 놓았다. 그 내력은 후대의 청량산 유람기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꾸어 놓아도 청량산 이름과 곳곳에 자리한 사찰과 많은 암자의 이름까지는 바꿀 수는 없었다. 많을 때는 30여 암자가 청량산 육육봉 곳곳에 자리하여 불국토를 이루었다. “퇴계 선생은 ‘나는 조용히 산에서 살고 있는데, 가을 흥취가 사람을 감동케 하여 그대로 이 가을을 보내기가 어렵기에 뜻을 같이할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네’라고 하여 제자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유리보전(琉璃寶殿). 편액은 공민왕 친필로 알려졌다. 


공민왕 친필 ‘유리보전(琉璃寶殿)’

청량사 금당에는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오는 ‘유리보전(琉璃寶殿)’ 편액이 걸려 있다. 유리(琉璃)는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를 말하는데 유리와 같은 칠보로 이룩된 청정한 세계로 약사여래께서 머무르는 세계를 말한다. 나말여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중앙의 약사여래는 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칠불(乾漆佛)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에 오른손은 항마촉지인, 왼손은 약합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눈은 중생을 굽어 살피시느라 약간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약사여래의 좌측에는 청량산을 표현한 듯한 4단의 대(臺) 위에 문수보살을 모셨는데 기존의 대좌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어 이채롭다. 머리에는 낮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통견에 설법인을 하고 있어 보살의 지혜로 중생의 번뇌를 말끔히 없애주고 있다. 


반가부좌 자세로 눈길을 끄는 유리보전 지장보살상.


우측에는 목조 지장보살이 왼손엔 중생의 어둠을 밝히는 구슬을 들고 오른손엔 육환장을 집고 지옥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에 여념이 없다. 언제라도 지옥중생이 부르면 곧 달려가기 위해 편한 자세인 반가부좌를 하고 있어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원래는 지장전에 모셨으나 지장전이 소실되어 이곳 유리보전에 약사불의 협시로 모시고 있다. 특히 옆에 입상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의 협시로 임진왜란 이전인 1578년에 조성된 조형성이 뛰어나 보물로 지정된 목조 지장삼존이다.


서양의 카우보이처럼 생긴 응진전 금강역사.


카우보이 닮은 응진전 금강역사 

옛날 외청량암(外淸凉庵)이었던 응진전은 원효스님이 머물렀던 곳으로, 고려 공민왕이 인근 안동으로 피난왔을 때 왕비 노국공주가 16나한을 모시고 기도를 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응진전은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나, 산봉우리를 바라보기 좋은 장소이다. 응진전 출입문 양쪽으로 선 문지기 금강역사는 서양의 카우보이처럼 생겼다. 서양 사람들도 깨달음을 이루고 싶었는지 이역만리 말을 타고 방금 도착한 듯 모습이 재미있다. 청량산 아름다움에 홀랑 빠지셨나? 문지기의 역할보다 바깥 단풍 구경에 여념이 없다. 그 옆에는 근엄하게 홀을 든 저승 판관, 허리를 굽혀 명부를 전하는 저승사자가 관모를 쓰고 서 있다.

응진전에 저승사자와 판관이라? 고개가 갸우뚱거리지만 이 또한 지장전이 소실되자 응진전에 더부살이하는 것 같다. 이 때문일까? 응진전의 저승사자와 판관은 염라대왕에게 보고하기 전 미리 청량사 나한님께 저승의 명부(冥府)를 바치나 보다. 이때 장난기 많은 나한은 평소 나한기도 잘하는 불자 이름이 들어 있으면 명부에서 이름을 슬쩍 빼주어 수명을 늘려주려는 듯하여 미소를 자아낸다. 

청량산 육육봉 가을 단풍은 차별된 현상이 서로 걸림 없이 펼쳐지는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를 연출하는 비로자나불임을 느낄 수 있다. 세상 살면서 왜 번뇌와 욕심이 없겠는가. 번뇌와 욕심에 자신이 치일 때는 단풍잎이 떠내려 오는 물길 따라 청량사를 찾아가자. 다양한 중생의 마음인 듯 오색의 단풍에 안긴 아름다운 청량사를 보는 그 순간은 바로 내가 부처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