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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여주 고달사지

“무차대회 열어 은혜에 보답하게 해다오” (원감현욱) 


“(원종대사) 수기설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 

“누더기 입은 납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혜목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아늑한 절터로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걷기에 좋은 곳이다. 원감국사를 개산조로 선(禪)의 튼튼한 뿌리 위에 솟아올라 조계종의 기둥이 되었던 고달사는 임진왜란 이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폐사되어 사지만 남아있다.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고달(高達)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볼 수 있는 고려 말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다. 혜목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아늑한 고달사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걷기에 좋은 조용한 절터로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다. 


석조대좌. 불상이 놓여있지 않지만 보존상태가 좋다. 


혜목화상이라 불린 원감현욱선사는 신라의 많은 국왕으로부터 스승의 예를 받았고 특히 경문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아 840년에 고달사를 창건하였다. 지혜의 눈이 번쩍이는 산에 깨달음이 높게 통달한 절,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의 원감국사는 한국 선종의 정통 적자로 육조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백암회해(백장)→원감현욱(圓鑑玄昱, 787~868)으로 이어지는 남종선의 계보를 이어왔고,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심희(眞鏡審希, 855~923)→원종찬유(元宗瓚幽, 869~958)로 법을 전했다. 이렇듯 고달사는 원감국사를 개산조로 선(禪)의 튼튼한 뿌리 위에 솟아올라 조계종의 기둥이 되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경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폐사(廢寺)되어 사지만 남아있다. 


원감국사 부도.
스승 백장선사 향한 원감국사 부도 

신라 말에 조성된 보물 원감국사 부도는 다수의 학자가 원종대사 부도로 생각해 왔다. 부도의 중대석(中臺石) 귀두(龜頭) 방향이 서향(西向)으로 틀어져 있어 서편 능선 높은 지점에 있는 국보 부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상승(師資相承) 관계로 보면, 법손(法孫) 제자(弟子) 원종대사가 할아버지인 원감국사를 바라보며 경배를 올린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조당집> 권17, ‘동국혜목산화상’조에 보면 원감국사는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백암(百巖)으로부터 전해 받은 은혜에 보답케 해다오. 그것으로 나의 소원은 끝나는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원감국사는 입적 때까지 스승 백장회해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제자들은 원감국사의 유훈(遺訓)을 실천하려고 의도적으로 원감국사 부도의 귀두 방향을 서쪽으로 향하게 하여 중국의 스승 백장선사를 바라보게 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서북쪽 산등성이에 원종대사 부도는 조성되지 않았을 때이다. 원감국사의 부도문양 중 서 있는 사천왕의 발밑 생령좌(生靈坐)는 사천왕을 두 어깨에 받들고 있는 모습이라 특이하다. 또 몸에 갑옷과 투구, 지물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양감이 풍부하여 정교하고 볼륨감이 있어 신라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달원 입구 ‘신털이봉’이 생긴 사연

원종대사 찬유는 선교일치(禪敎一致) 성향을 가진 스님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투자대동에게 수학하고 921년에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 “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 

대사는 이곳에서 입적 후 원종대사의 시호를 받고 국공(國工)이 파견되어 977년(경종 2)에 원종대사혜진탑과 탑비를 조성하였다. 혜진탑비문에 “혜목산 서북쪽 산등성이에 부도를 세웠다”는 내용과 보물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 및 이수에 나타난 용들의 조각과 국보 부도 중대석에 새겨진 용들의 조각은 새김이 깊어 볼륨감이 크고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쳐 친연성(親緣性)을 보이고 조각기법 또한 비슷하여 더욱 원종대사 부도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원종대사 부도.
국보다운 조각 기법 

4대에 걸친 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은 대사답게 부도의 높이 340cm, 부도비의 높이가 280cm 규모로 크고 당당하다. 이 부도는 8각 원당형을 기본구조로 조성되었다. 하대석에는 커다란 연잎을 깔아 안정감을 주었고, 중대석 중앙에는 귀부의 용머리가 정면을 향하고 양 측면에는 각각 두 마리 용이 서기를 뿜으며 보주를 받들고 있다. 뒤쪽에는 용들이 꼬리를 교차하여 힘을 느끼게 한다. 귀부 등 위 상대석은 커다란 연꽃이 피어올랐고 그 위에 탑신과 육중한 지붕이 있다. 그런데 정면의 용은 무거운 탑신과 지붕돌을 짊어졌음에도 여유롭게 웃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크고 무거운 부도이지만 연꽃의 밑을 깊게 파서 연꽃이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했고 또 지붕은 뒤집힐 듯 팔각 지붕면이 하늘로 솟아 상승감을 주고 있다. 또 탑신은 지붕과 연꽃에 비해 작게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조각했다. 과연 국보다운 조각기법이다. 용이 짊어져야 할 무게의 중압감을 보는 사람이 느끼지 않도록 조성한 멋진 부도이다. 

스승과 제자사이 소통의 공간

특히 원종대사 부도 동서 두 면에는 살창문을 새겨 스승과 제자사이에 소통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부도의 주인 원종대사가 영원히 살아 계심을 나타낸 것인데, 누구라도 와서 이 살창문을 통해 법을 물으면 원종대사는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라고 마조선사의 이야기를 해 줄 것 같다. 

아울러 원종대사 혜진탑비도 귀부와 이수가 당당하며 위엄이 서려 있다. 귀부의 머리는 턱 아래쪽에 길게 용린(龍鱗)이 있고, 입은 굳게 다물었지만 입술 사이로 굵은 이빨을 드러냈다. 깊은 콧구멍, 부릅뜬 두 눈, 넓은 귀, 다섯 발가락에 발톱이 길어 역동적인 힘을 발산하고 있다. 이수 또한 용과 신령스런 기운이 이수 전면에 가득 배치되었다. 그 안에 용이 제액을 받들고 있어 수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금당지에 있는 정방형의 큼직한 4각 상하 대좌에는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의 연꽃 조각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중대 간석에는 영기창(靈氣窓)이 정갈한 멋을 풍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