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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양주 회암사

나옹 지공 무학 ‘삼화상’ 불교중흥 원력 보일 듯 …


조선왕조실록과 김수온이 지은 ‘대원각사 비명’에
“효령대군 보(補)께서 천보산 회암사에 석종을 세워
석가여래 사리를 안치하고, 원각경을 강의하였다.

이날 저녁에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신승(神僧)이 단상을 왔다 갔다 하며 서기가 넘쳐
방광…사리가 분신, 800여 과가 되었다”고 전한다.

 


회암사지. 조선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1만여 평의 규모에 3단, 8개 구역으로 크게 지어 경주 황룡사에 버금가는 대찰로 조성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양주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는 옛날부터 절이 있었으나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지공선사가 나옹선사에게 “그대는 그대 나라로 돌아가 산이 셋 모인 삼각산을 마주하고 강줄기가 둘로 흐르는 한강과 임진강이 흐르는 곳에 불법(佛法)을 펴라. 그러면 자연 흥할 것”이라 했다. 환국하여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회암사를 중창하기 시작하여 1376년 4월에 문수회(文殊會)를 크게 열었다.

고려 말 이색이 쓴 〈회암사수조기(修造記)〉에 “지공선사가 땅을 잡아서 그 산수의 형상이 완연히 인도의 나란다 사원과 같은 복된 곳이 분명하다”고 했다. 또 나옹선사가 중창한 사찰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보광전, 사리전(舍利殿), 정청(正廳)등 모두 262칸에 이른다. 4.8m가 넘는 부처님 7분과 3m 크기의 관음보살이 웅장하고 미려하기가 동국에서는 제일로서 모두 말하기를 비록 중국에 간다 해도 이런 절은 많이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 태조 이성계, 황룡사 버금가는 대찰 조성

조선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1만여 평의 규모에 크게 3단으로 구획하고 8개 구역으로 나누어 크게 지어 경주 황룡사에 버금가는 대찰로 조성했다. 이성계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왕궁의 별궁으로 회암사를 자주 드나들며 건국에 희생된 사람들과 부인 강 씨와 두 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특히 회암사는 효령대군의 원찰로 전한다.


회암사지 세존사리탑.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는 여러 가지 이적으로 더 눈길을 끈다.

 


회암사지 세존사리탑의 기린 문양.


<조선왕조실록> 세조10년(1464)과 김수온이 지은 ‘대원각사 비명’에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께서 천보산 회암사에 석종(石鍾)을 세워 석가여래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에 법회를 열어 <원각경>을 강의하였다. 이날 저녁에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신승(神僧)이 단상을 왔다 갔다 하며, 서기가 넘쳐흘러 방광(放光)하고, 감천(甘泉)이 널리 젖어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800여 과가 되었다. 5월 갑인일에 효령군 보께서 영적(靈跡)을 갖추고 사리를 받들어 아뢰니, 전하께서는 왕비전하와 더불어 함원전(含元殿)에서 예불을 드렸는데, 사리가 또 400여 과를 분신하였다”고 했다.

지금도 회암사지 북동쪽에는 당시 이적을 보인 세존사리탑이 있다. 이 사리탑은 3단 기단위에 연꽃을 조각하고 둥근 탑신을 올린 후 상륜부를 장식했다. 팔각 기단 아래받침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과 기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윗받침돌은 8금강역사와 덩굴무늬로 장식한 후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그 위에는 별도의 돌로 3단의 받침을 두어 사리를 떠받드는 공경심을 표현했다. 경사가 급한 팔각지붕 위 상륜은 연꽃과 복발, 보륜, 보개 보주 형태로 장식하여 안정감과 당당함을 가지면서도 화려함이 느껴진다.

☞ 보우대사 입적 비운, 대가람 화암사도 불타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허응당 보우대사는 1565년 회암사를 크게 중수하고 귀천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널리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무차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1566년 죽은 후 보우대사는 유생들로부터 요승으로 몰려 제주에서 죽임을 당하고 회암사도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명종21년(1566) 4월20일 명종은 “유생들이 회암사를 태우려고 한다 하니 듣기에 매우 놀랍다. 식견(識見)이 있는 진정한 유자라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우려를 나타냈다. 그 후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1595) 6월4일 “회암사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니 이것을 조총을 주조하는데 가져다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다”하여 결국 회암사는 유생들이 불을 질러 그 큰 가람이 사리지게 되었다.


양주 회암사 동쪽 능선을 따라 오르면 위쪽에서부터 나옹, 지공, 무학스님의 부도가 남북 선상에 차례로 있다. 사진은 나옹스님 부도탑.


☞ 동쪽 능선 따라 ‘나옹-지공-무학’ 부도

회암사 동쪽 능선을 따라 오르면 능선 위쪽에서부터 나옹, 지공, 무학스님의 삼화상 부도가 남북 선상에 차례로 있는데, 먼저 능선 북쪽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다. 선사는 1376년 우왕의 명에 의해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추방되어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니 사리 155과를 얻어 1381년에 절의 북쪽 벼랑 위에 부도를 세웠다고 ‘회암사 선각왕사 부도비’에 전한다.


지공스님 부도탑.


능선 가운데에는 지공선사 부도가 있다. 이색이 쓴 ‘서천 제납박타존자 부도비’에 “지공선사는 가섭존자 이후 108번째로 의발을 전해 받은 존자로 “앞으로 나아가면 허공(虛空)이 텅 비어 있고, 뒤로 물러나면 만법이 모두 물에 잠긴다”하여 호를 지공(指空)이라고 했다. 공민왕 19년(1370년) 중국 원나라의 달예스님이 선사의 영골 사리를 모시고 와서 공민왕 21년(1372)에 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이 두 부도는 8각을 기본형으로 한 3단의 기단 위에 올린 원당형 탑신으로 문양이 없어 간결하다. 8각 지붕위에 보륜, 보개 보주를 머리장식으로 얹었다. 부도 앞에는 직사각형 공양대를 두었다. 장명등은 4각을 기본형으로 한 두 개의 직사각형 돌을 세워 앞 ·뒷면에 창을 냈다.


무학스님 부도탑. 지공 나옹 무학 세 스님의 부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한 삼화상의 원력을 생각하게 된다.


☞ 눈길끄는 무학대사 부도 공양대

능선 아래 남쪽에는 무학대사 부도와 쌍사자 장명등이 장중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무학대사는 1405년에 입적하였지만 이 부도는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위해 1397년에 미리 만들어 두었다. 부도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8각 연화좌 위의 둥근 탑신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왕사의 위엄을 나타냈다. 용의 5개의 발가락과 머리와 몸, 비늘 등이 돌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생동감이 있다. 8각 지붕돌은 추녀가 가볍게 들려있고 각 면마다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연꽃모양의 보주를 올려놓았다.

부도 앞 공양대는 직사각의 큼직한 돌로 만들어져 있고 다리는 왕릉의 혼유석처럼 연결된 원형고리 문양을 새겨 놓아 특이하다. 쌍사자 장명등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바닥위에 가슴과 배를 서로 붙인 쌍사자가 장명등을 들고 있다. 사자는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짧고 굵은 두 다리와 두 팔은 약간 벌린 자세로 힘을 주는 모습이 앙증맞다. 화사석은 두 개의 직사각형 돌을 세우고 앞뒤로 기둥을 세워 앞 ·뒷면에 창을 내었다. 회암사 지공 나옹, 무학 삼화상의 부도를 바라보면 불교의 중흥을 위해 헌신한 스님들의 불퇴전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